대한제국 특무정교 출신, 죽는 순간에도 일장기 밑에서 궁성요배
조선총독부 ‘불타는 애국열’·‘애국옹’이라며 대대적 홍보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 영화 만들고 일제 교과서에도 실려

일제강점기, 일제로부터 '불멸의 애국옹'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이원하(가운데)는 대한제국 특무정교 출신이다.  임종 직전 사경을 헤매던 이원하는 일장기가 게양된 게양대(왼쪽)앞에서 궁성요배를 하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원하의 이야기는 '국기 아래에서 죽으리'(오른쪽. 영화의 한 장면)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일제강점기, 일제로부터 '불멸의 애국옹'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이원하(가운데)는 대한제국 특무정교 출신이다.  임종 직전 사경을 헤매던 이원하는 일장기가 게양된 게양대(왼쪽)앞에서 궁성요배를 하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원하의 이야기는 '국기 아래에서 죽으리'(오른쪽. 영화의 한 장면)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원하의 죽음을 다룬 영화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의 한 장면 
이원하의 죽음을 다룬 영화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의 한 장면 

1907년 군대가 해산될때까지 특무정교를 지낸 대한제국 최후의 군인 청주사람 이원하(李元夏. 1866~1939).

군복은 벗었지만 그의 애국심은 꺼질 줄 몰랐다. 그의 애국심을 반영하듯 이원하가 죽었을 때 언론은 ‘열열한 애국적 열정가’, ‘불멸의 애국옹(翁:노인)’이라며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언론이 ‘불멸의 애국옹’이라고 부르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원하는 죽기 직전 3일간 인사불성의 상태가 됐다. 그를 돌보던 부인이 잠든 사이 인사불성 상태에 있던 이원하는 몸을 일으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국기게양대로 향했다.

국기게양대 앞에선 이원하는 동쪽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절을 마친 이원하는 남은 힘을 향해 다리를 모으고 정좌했다. 그 자세에서 이원하는 최후의 숨을 거뒀다.

국기 앞에서 절을 하고 마지막 숨을 거둔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 그는 그렇게 ‘불명의 애국옹’이 됐다.

문제는 그가 숨을 거뒀던 게양대에 휘날린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일장기 였다는 사실.

그가 절을 한 동쪽은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방향이었다.

이원하의 ‘불멸의 애국’하는 마음은 바로 일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였다.

 

대한제국의 특무정교 이원하

1908년 유종국이 지은 모충사실기(慕忠祠實記)에 따르면 1887년 당시 병마절도사 홍재희(洪在熹)는 병영의 청사를 창건하고 병사를 모집해 군사를 훈련시켰다. 이듬해인 1888년 진남영(鎭南營)의 영호가 하사된다.

모충사실기에 따르면 이원하는 진남영의 특무정교(特務正敎)였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매일신보(每日申報) 1939년 2월 10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원하는 진남영 특무장교로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원하의 군인으로서의 삶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령과 동시에 끝이 난다.

군인의 삶은 끝났지만 그의 충성심은 ‘모충회(慕忠會)’로 이어진다. 모충회는 1894년 9월(음력) 청주성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진남영 소속 72명의 관군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매일신보는 이원하가 “동학란 당시 희생된 72군인의 충용을 영원히 위령하기 위해 설립된 청주 모충회 회장으로 있어 모충사상을 고취했다”고 보도했다.

 

이원하는 어떻게 애국옹(애국노인)이 되었나?

 

매일신보는 이원하가 “명치40년경 청주 남면장이 되었으며 면장 직을 사임한 후에는 은거했다”고 보도했다.

이 시문에 따르면 이원하는 소화8년(1933년)에 농촌진훙운동이 일어나자 사창리(현 청주시 사창동)의 구장이 됐다. 매일신보는 이원하가 농촌갱생에 선력을 다해 퇴폐한 사창리를 바로잡았다고 했다.

1939년 2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 기사에 이원하가 사경을 헤매다가 마지막 힘을 다해 일장기가 내걸린 게양대 앞에서 일본 황궁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고 정좌한채 숨을 거뒀다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1939년 2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 기사에 이원하가 사경을 헤매다가 마지막 힘을 다해 일장기가 내걸린 게양대 앞에서 일본 황궁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고 정좌한채 숨을 거뒀다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원하의 친일행위는 일제강점기 매일신보에 수차례 보도된다. 매일신보는 1927년 1월 8일자 기사에서 모충회 회장으로 있는 이원하가 일 천황 요시히토의 죽음을 기리며 청주시 사직동 모충사에서 1백여명과 함께 (궁성)요배를 했다고 전했다. 궁성요배는 천황이 사는 궁을 향해 절하는 것을 가리킨다.

궁성요배를 하는 등 행위를 했다하더라도 평범한 촌민에 불과했던 이원하는 어떻게 ‘불멸의 애국옹’이 되었을까?

매일신보는 1939년 2월 10일 ‘애국적 열정가의 귀감’이란 기사를 통해 이원하의 죽음을 알렸다.

매일신보는 먼저 “이원하는 72세의 고령으로 (사창리: 현 청주시 사창동) 구장의 직에 있어 부락민을 지도하며 그 부락을 갱생시키어 내려오던 중 노쇠병으로 지난 1월 초순부터 와병했다”고 전한다.

이어 “23일경부터는 인사불성이 돼 중태에 빠졌었는데 1월 26일 오전 한 시경 그의 처 박연산이 간병에 피로하여 잠깐 잠든 사이에 인사불성의 중태에 있던 동 병인(이원하)이 약 1정(100여m)이나 떨어져 있는 국기게양대 앞에 가서 동방(일본 천황이 사는 궁궐 방향)을 향하여 정좌하고 궁성을 요배(절)한 후 그대로 영면하였다”고 했다.

매일신보는 이 씨의 죽음에 대해 “평소의 애국심이 무너져가는 육체를 무의식중에 국기게양대까지 운반하여 동쪽 하늘에 절을 하게했다”며 “이와같은 열정은 이원하씨 아니면 찾을수 없다. (한)반도 인사 전반의 명예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는 평가를 덧붙인다.

 

영화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

조각상 만들고, 교과서 등재까지

 

이 씨의 죽음을 전한 매일신보는 계속해 이원하에 대한 기사를 쏟아낸다. 이 씨의 죽음을 보도한지 하루 뒤인 1939년 2월 11일 매일신보는 ‘이원하 옹의 애국미담, 소(초등)교 교과서에 등재’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했다.

이어 매일신보는 “이원하 옹(노인)의 애국열은 범인으로는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할 바”라며 “(한)반도인 전반의 애국열을 고취함에 다시 없는 귀감이 되고도 남을 바이라 하여 이원하옹의 애국열을 금번에 편찬하는 소학교 교과서에 등재하기로 하였다”고 전했다.

이원하가 숨을 거뒀다는 일장기를 건 게양대
이원하가 숨을 거뒀다는 일장기를 건 게양대

같은 해 2월 16일 매일신보는 청주경찰서장과 청주모충회장, 충북도의회의원 등 청주의 유지들이 이원하의 추모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또 그의 (친일)사적을 조사해 팜플렛으로 만들어 전 조선에 배포할 계획이라고 알렸다.

이틀 뒤인 1939년 2월 18일자 보도에서는 일본인 청년조각가 토바리 유키오(戶張幸男)가 이원하의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청주를 답방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해 4월 12일에는 조선 조각계의 권위자 김복진(金復鎭)씨는 이원하의 흉상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압권은 그의 죽음을 다룬 영화 ‘국기앞에서 죽으리’다.

이원하의 행적을 다룬 영화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의 한 장면
이원하의 행적을 다룬 영화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의 한 장면

1939년 4월 13일 매일신보는 조선문화영화협회가 이원하의 애국열을 널리 소개하는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이원하의 집과 청주시 사창동을 답사했다고 전한다.

이 소식이 있을 뒤 3달 뒤인 1939년 7월 18일 매일신보는 ‘불명의 애국옹, 영화 완성돼 시사회’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이에 따르면 조선영화협회는 이 씨의 행적을 다룬 ‘국기 밑에서’ 영화를 제작해 17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국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사회를 진행했다. 주연은 한국인 김건·복혜숙이 맡았다.

영화의 최종제목은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라’로 줄거리는 이렇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원하는 전쟁애 나가 싸우는 일 황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청년들과 근로보국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한다.

때 마침 중국의 난징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원하는 손수 일장기를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신사참배를 한다.

그해 겨울 병을 얻은 이원하는 죽음이 닥쳐온 것을 알고 사력을 다해 밖으로 기어 나온다. 이원하가 없어진 것을 안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기게양대로 달려간다.

그곳에는 두손을 땅에 집고 일본 궁성을 행햐 공손히 주검을 마친 이원하의 차디찬 시신이 있었다.

 

‘조선의 히틀러’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로 방문

이원하의 아들 “선친 유훈 받들어 황국신민으로 몸을 바칠 각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히틀러’라 불릴 정도로 가장 악명높은 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로 이원하가 죽은 곳을 찾았다.

1939년 6월 8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조선총독 미나미지로는 11일 아침 이원하의 고향인 청주군 사주면 사창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방문한 자리에서 이원하의 업적을 칭송하고 유족을 비로한 주민 일동에게 빛나는 영예를 표창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1939년 6월 12일자 매일신보 기사. 이원하의 아들 이범준(사진 왼쪽 흰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서울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석해 이원준의 조각상을 둘러보고 있다. 조각상에는 이원하가 일장기 밑에서 두손을 모으고 참배하는 모습이 새겨졌다.
1939년 6월 12일자 매일신보 기사. 이원하의 아들 이범준(사진 왼쪽 흰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서울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석해 이원준의 조각상을 둘러보고 있다. 조각상에는 이원하가 일장기 밑에서 두손을 모으고 참배하는 모습이 새겨졌다.

이원하의 얼빠진 행적처럼 그의 아들도 아버지와 다를바 없었다.

1939년 6월 13일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이원하의 아들 이범준은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는 서울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일본인 조각가 토바리 유키오(戶張幸男)가 만든 이원하의 조각상이 전시됐다.

매일신보는 이 씨의 아들이 “감회 깊게 선친의 생존 시 모든 일을 추억하면서 조각 앞에서 업드려 공손히 절을 한 후에 옆에서 설명하는 그 조각품의 제작자 토바리 유키오에게 재삼 치하 하면서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 어리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극적 장면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이어 이 씨는 “이미 지하에 가서 계시지만 세상에서 그 생존 시의 애국열을 알아주시게 되니까 영혼이나마 기뻐하실 것”이라며 “나와 가족은 앞으로 우리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황국신민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칠 각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원하 사후 “지하서 통곡” 왜?

 

일제 조선총독부로부터 ‘불멸의 애국옹’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이원하는 죽은 지 2년 뒤 다시 언론에 등장한다.

1941년 1월 9일 매일신보는 ‘애국옹 지하서 탄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1941년 1월 9일 매일신보 기사. 애국옹 이원하가 지하서 통곡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1년 1월 9일 매일신보 기사. 애국옹 이원하가 지하서 통곡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원하가 죽은 뒤 가족이 그의 묘지를 담보로 어떤 고리대금업자에게 6백원을 빌렸다.

상환 기간이 만료됐지만 이원하의 가족을 그 돈을 갚지 못해 대금업자에게 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고리대금업자는 요청을 뿌리치고 담보로 잡은 이원하의 묘지를 경매에 부치려했다.

매일신보는 이런 사실을 알린 뒤 “지하에 들어간 애국옹을 생각하면 애달프다”며 “고리대금업자의 악착한 소행을 청주일반 식자 간에서는 비난하고 있다”고 전했다.

매일 신보는 3일 뒤에는 당시 일본인 청주부읍장과 충북도회회원이 채권자를 회유해 채무 상환기간을 6개을 연기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시절 보도된 이원하의 행적은 청주시 사창동과 현재 모충동에 있는 모충사와 관련돼 있다.

모충사는 1894년 갑오동학농민 혁명당시 농민군과 전투과정에서 숨진 관군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조선왕조 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현충시설로 알려져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