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시절 국무총리와 외무장관을 역임한 변영태씨는 평소 결벽 하리만큼 청빈한 생활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괴팍한 성격만큼이나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해방 전 교편생활을 하던 그가 처음 관직에 임명된 것은 1947년 1월, 정부수립에 대한 승인을 얻기 위해 개인특사로 필리핀에 갈 깨였습니다.
그가 출국준비를 하자 외무부 관리들은 “필리핀은 더운 나라이니 동복과 하복을 함께 가져 가야한다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면 수화물 탁송료가 더 든다”면서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얇은 여름양복을 단벌로 입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변 고집’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마닐라에 도착해서도 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차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그곳 정부관리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와서는 귀국보고와 함께 쓰다 남은 출장비 10달러를 반납해 돈이라면 ‘노랭이’로 불리던 이승만대통령을 감격시켰습니다. 그는 그 뒤에도 국제회의 때마다 적게는 10달러에서 최고 3000달러에 이르기까지 출장비를 아껴 그때마다 반납했고 총리와 장관이 된 뒤에도 부하 직원들에게 해외에 나가서도 걷거나 전차, 버스를 타도록 권고해 애를 먹이곤 했습니다.
그런 그가 뒤에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낙선하자 주저 없이 영어학원 강사로 변신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어느 날 논어를 영어로 번역하던 중 아궁이에 연탄을 갈아넣다 그만 가스에 중독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는 생전의 뜻에 따라 사회 장을 마다하고 가족 장으로 치러졌고 정부에서 보낸 조위금 300만환 은 고려대학에 장학금으로 기탁됐습니다.
국무총리라는 직책은 비록 시대는 바뀌었다해도 지난 시절 영의정에 버금가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고매한 인격은 물론 남다른 경륜과 높은 도덕성을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근자 국무총리에 임명된 두 사람이 재산 형성과정 등이 문제가 돼 연거푸 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것을 보면서 지도층들의 도덕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됩니다. 그것도 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대학총장이라는 이, 신문사 사장이라고 하는 이가 그처럼 떳떳하지 못한 의혹을 숨기고 있었다는데 는 실망을 넘어 냉소를 금치 못 합니다.
겉으로 보아 화려한 경력과 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도 막상 속을 뜯어보면 그처럼 오점을 갖고 있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소위 지도층이라는 이들 치고 털어 먼지 나지 않는 이가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인물은 많은데 쓸 그릇은 없다는 말들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조선초기 명재상 이였던 황희는 무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비가 새는 집에서 살았을 만큼 청빈(淸貧)했다고 합니다. 황희나 변영태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켰기 때문 이였습니다. 허나, 지금 우리사회는 세태가 비속해져 불행하게도 그런 비범한 인물을 갖고있지 못합니다. 그러니 정치가, 아니 나라가 이렇게 편안한 날이 없을 만큼 아귀다툼으로 새고 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까마귀 우짖는 곳에 백로가 없는 이치라고나 할까요.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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