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무의 역사의 오솔길

   
문장대, 천황봉에서 머물던 가을이 법주사를 내리 덮친다. 단풍으로 시작되는 절 집의 가을은 날마다 혼돈과 고요가 번갈아 온다. 행락인파가 지나고 난 자리에 범종이 울면 저녁 어스름이 찾아들고 산방엔 이내 고요 바람이 대웅보전 주위를 맴돌며 서방정토에 있는 무아지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붉고 노란색으로 채색된 절 집의 단풍은 세속의 나뭇잎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맑은 바람, 붉은 태양으로 멱 감고 화엄의 바다로 흩어진 청정한 모습은 티끌에 절은 회색도시의 단풍과 차이가 있다. 산 정수리를 타고 내려온 서늘한 바람에 푸르던 이파리 제 색깔을 잃고 형형색색으로 변해 진혼곡을 부르니 계절의 순환 앞에 동화된 천년세월도 때로는 변덕스럽게 느껴진다.

1천5백 여 년 동안이나 절 집 마당을 방황하던 단풍잎은 법열에 취해 대웅보전 몸체에 붙어 단청으로 변해버렸으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단청의 연두색은 봄이요, 푸른색은 여름이며, 붉고 노란 색은 가을이고 흰 색은 겨울이니 사계절의 색깔은 이미 절 집이 먼저 담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절 집 중 중심이 되는 법당이다.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을 일컬음이다. 불교에서의 대웅(大雄)은 바로 석가모니요 이 분을 모신 불전을 일반적으로 대웅보전이라 부른다.

법주사 대웅보전에는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가운데에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는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는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선종에서는 삼신설(三身說)에 따라 대웅보전에 이 세 부처님을 모시는 게 일반적이다.

이 삼신불은 쇠로 만든 철불도 아니요, 나무로 만든 목불도 아닌 진흙을 빚어 만든 소조불상이다. 국내에서 가장 큰 소조불상으로 보물 제 1360호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훼손을 우려, 대웅보전 해체보수공사 때 원래자리에 덧 집을 씌운 뒤 공사를 하였다.

법주사 대웅전은 부여 무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으로 손꼽힌다. 정면 7칸 측면 4칸 중층(重層) 건물로 겉에서 언뜻 보면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케 한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어떻게 이런 건물을 지었을까 장인의 예지에 탄복이 가지만 높이 80m 가 넘는 황룡사지 목탑, 익산 미륵사지 목탑을 쌓아올린 삼국기의 건축예술을 상기하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법주사 내의 절 집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거의 불타 없어졌다. 그 폐허 위에 인조 2년(1624년), 벽암대사가 대부분 중건을 한 것이다. 근 5백년이 흐르는 동안 기둥이 부식되고 뒤틀려 건물의 안전도가 낮아지게 되자 이번에 70억원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으로 보수를 한 것이다.

화강암으로 기단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여러 기둥과 위층까지 치솟은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사이에 여러 툇보를 걸어 위층까지 통하는 공간을 확보한 점이 특이하다. 기둥사이의 공간에 모신 세 분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는 언제나 중생을 반갑게 대한다.

대웅전 지붕 위에는 예로부터 몇 장의 청기와가 있었다. 신라 말에 구워 얹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려시대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찍은 법주사의 사진을 보면 대웅보전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대웅보전 뒤로 밭을 가는 농부와 대웅보전의 콘트라스트(대비)가 아주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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