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더위가 기승이다. 정수리를 쪼는 볕이 지난해 삼복만큼 뜨거웠다. 종일 바람도 없이 하루가 저물었다. 장바구니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이마에 땀을 훔쳤다. 한낮 더위 피한다고 저녁 어스름에 집 근처 마트를 다녀온 길이었다. 서둘러 반찬거리를 풀었다. 손보다 마음이 바빠서였을까. 채소며 가공식품의 포장을 뜯는 것도 일이라 느껴졌다. 종이 포장을 뜯고, 비닐 포장을 벗기고, 플라스틱 용기를 열어야 식재료가 나왔다. 심지어 그 안에 개별 포장이 또 있었다. 말끔하게 손질된 온전한 형태의 재료 하나를 모셔 온 셈이었다. 저녁 준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단출한 밥상을 차릴 준비가 한참 만에 끝났다. 가스불 앞에서 반찬 몇 가지와의 씨름이 끝은 아니었다.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플라스틱 용기에서 종이를 일일이 떼어냈다. 분리 배출될 비닐을 구분했다. 캔과 유리병 안에 남아있는 내용물을 씻어냈다. 어제 버리고도 오늘 하루 모아 놓은 쓰레기가 또 한가득이었다.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더 많았다. 누가 보면 푸짐하게 먹고사는구나 할 수도 있겠지 싶었다. 편하고 깨끗한 생활을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수고가 아닐까 하는 체념에 가까운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배달 음식이나 간편 조리식이 낫지 않을까. 식사 시간에 맞추기 위한 시간과 노력도 줄이고 먹거리에 들이는 비용도 별반 차이가 없다면 말이다. 그래 봐야 조리된 음식을 겹겹으로 싸고 여민 비닐봉지와 담아 온 플라스틱 용기 처리 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해결책 없는 궁리를 해 보았다.

작년 이후로 택배 상자가 점점 늘어 간다. 주문한 작은 물건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도착했다. 한 번 포장을 마친 제품이 에어캡에 둘둘 말려 몸집을 부풀렸으니 그에 맞는 상자였을 것이다. 이젠 몇 날 고른 물건을 받는 기대와 설렘, 택배 상자를 열어보는 흥분보다 갈무리할 쓰레기가 더 걱정인 지경이 되었다.

양손에 쓰레기를 바리바리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한쪽 면에 쓰레기 분리수거 방법을 알리는 공지문이 붙어 있었다. 단순한 생활 수칙을 전달할 목적뿐만은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재활용품 분리수거하기만 잘해도 물 정화, 산림 보호, 토양 오염 방지, 자원 절약의 효과를 준다고 덧붙여 있었다. 출퇴근만 해도 하루 두 번은 보겠다. 알게 모르게 교육이 되고 있었구나. 1층으로 내려가는 짧은 순간에 손에 들린 쓰레기를 점검해 보았다. 나는 제대로 잘하고 있는가. 저대로만 하면 우리가 사는 동안, 아니 내 자식의 자식이 살아갈 미래에도 지구는 버텨줄 수 있는가. 소비자인 우리 개인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환경오염을 줄이고 지구 온난화 속도를 늦출 수 있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뭔지 모를 막막함이 담겨 있었다.

아침보다 높게 일어난 쓰레기장의 크기는 더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청소년이 어른보다 기후가 변한 지구에 더 오래 머문다. 청소년은 사계절을 어떻게 설명할까. 굳이 사계절로 나눠야 할까 고민할지도 모른다. 봄과 가을이 유독 짧고 폭염과 한파가 전부인 여름, 겨울로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의 세상을 그려보는 상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는 기후 변화로 초래되는 기후 재난을 막을 길이 없다. 미세먼지와 사투를 벌이고 기후 재난 지역을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못 할 노릇이었다.

요즘 기후 위기로 연대하는 세대는 점점 젊어지고 있다.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대표적이다. <청소년기후행동>이라는 단체에서 수많은 한국의 그레타 툰베리가 활동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심지어 초등학생마저 피켓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도 보았다. 단호하게 뿜어져 나오는 여린 목소리는 알고 있었다. 기온 상승이 2도를 넘기면 지구는 인류의 노력과 관계없이 스스로 온난화를 가속한다는 것을, 태양열을 반사하던 극지방의 빙하가 사라지고 영구 동토에 묻혀 있던 메탄이 대기로 방출된다는 것을 말이다. 벼락치기 시험은 볼 수 있어도 벼락치기로 지구를 살려낼 수 없다는 사실을 청소년만 아는 것일까.

비옥한 토양이 부식되고, 멋지고 근사했던 숲이 파괴되고, 바다가 산성화되는 현상을 어른 세대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잘 살기 위한 대가쯤으로 여기기에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올 기후 재난은 생명의 위협으로 느껴진다는 말이 당연하다. 지금의 어른 세대가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지연하고 기후 재난을 막을 예산을 함부로 써버리면 그로 인해 겪게 될 사회적 부담은 오롯이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기후 변화 대응의 책임을 방기한 것은 어른 세대임에도 그 결과를 지독하게 감수해야 할 세대는 따로 있다는 것이 나 조차도 두렵고 슬프다.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그저 기특하다고 여긴다면 책임감 없는 어른일 것이다. 기후 위기를 정치, 경제적인 제도 개혁이 아니라 플러그 뽑기, 자원 재활용 등 개인적 실천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안일한 인식 먼저 바꿔야 한다. 뜨거워지는 지구가 계층 간 불평등도 가속화한다는 예측은 분명 사실이 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지구 온난화의 피해는 더 혹독하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계획을 이야기하는 높은 사람은 많았다. 선거철마다 구색 맞추기 식으로 던지는 공허한 공약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간절했을까. 미래가, 생명의 존엄이 경제 성장이나 대기업의 이윤보다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만큼 말이다.

유리, 캔, 종이, 음식물을 분류해 넣었다. 소비 욕구를 일게 하는 기업의 상표들이 쓰레기로 버려졌다. 쓰레기도 잘 버리면 자원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 미래의 생존 문제, 결국에는 지금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란 말인가. 현재 내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는 말일까. 왠지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고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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