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여전히 많은 방문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앞을 잘 보고 걷지 않는다면 금방 사람과 부딪혀 넘어질 정도였다. 3년 전 어머니는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 정기적인 검진과 약 처방을 받기 위해 6개월에 한 번 방문하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질 정도로 어머니의 불안과 두려움은 온데간데없다.

“돈 많이 나왔지?” “6천 5백 원 나왔어요.” “세상 좋아졌다.” 평생 녹슬 틈 없는 호미처럼 살아온 어머니의 말투가 갓 쪄낸 감자알처럼 폭신폭신하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치료는커녕 병원 문턱도 가보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본 어머니는 크고 좋은 병원에서 매번 ‘건강 이상 없음’을 확인하는 데 몇 천 원이면 된다는 사실에 든든하고 위로를 받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일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지난 토요일 접종을 마쳤다. 화이자 1회차 백신을 접종한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어.”라며 모종의 불안을 몸소 씻어 낸 듯 단호한 말투였다. 필자도 이미 접종했던 AZ 백신을 맞을 예정인 어머니는 “얼른 맞아야지.”라고 할 뿐 더는 말씀이 없었다.

부모님도 내심 불안했을 것이다. 언론에서 어찌나 국민 걱정을 하는지 백신 접종 후“마비되었다.”, “쓰러졌다.”, “의식이 없다.”, “사망했다.”라는 내용이 연일 보도되고 기사화되었다.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틈’은 상황에 따라 빛이 보이는 희망이 될 수도, 유독가스가 스며드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인류가 직면한 험난하고 위험한 상황을 여당, 야당, 국민 모두 한곳을 보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상식적이지 않을까? 일부 언론의 집요한 보도는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국민에게 불안감을 싹트게 했다.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 세계 다른 나라의 현황이나 상황을 제시하고 우리나라가 잘하고 있는 점과 부족한 점을 객관적 입장에서 다루는 기사였다면 어땠을까? 언론이 국민에게 정보 전달자의 역할과 가짜 뉴스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면 국민은 언론은 신뢰하고 의지할 것이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 이후 정부와 국민의 대처에 대해 세계에서는 호평과 칭찬을 보내고 향후 경제 전망에 대해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제시함에도 “우리 국민이 이렇게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들을 보란 듯이 해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냅시다.”라는 희망을 주는 기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 사는 일이야 과거나 현재나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겠지만 삶의 형태나 환경이 너무 빠르게 바뀌다 보니 피로감을 느낄 때가 많다. 언론을 둘러싼 환경이나 언론의 효용 정도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사가 마치 홈쇼핑의 상품처럼 느껴진다. 그것도 유행에 따라 디자인 위주로 저렴하게 빨리 만들어 내지만 쉽게 버려지는 패스트패션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매체와 인터넷 환경 속에서 소위 ‘읽히고 팔리기’ 위해서 더 자극적이고 더 소모적인 방향으로 변모했는지도 모르겠다.

퇴근길 음성군청 앞에서는 청소 노동자들이 음성군 민간위탁 업무 직접고용을 주장하는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오래되었지만 한결같다. 그 앞을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에게 결의를 돋우는 투쟁가는 소음으로 들리기도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올곧은 외침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상품으로 치부될 수 없듯 어두운 밤길, 전짓불이 되어 앞을 비출 수도 있는 언론의 역할이 새삼 절박하게 다가온다.

낡은 유모차에 빈 상자를 싣고 가는 허리 굽은 노구의 뒷모습이 묵직하다. 그 무엇은 노구가 놓을 수 없는 희망일 것인지 아니면 빈 상자 사이에 끼인 명함 쪽일 것인지. 밥 앞에 평등! 법 앞에 평등! 코로나19를 넘어 사람의 목소리가 6월 녹음보다 진하고 묵직한 울림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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