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처럼 넓은 비행장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비행기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풍선을 하늘로 띄웠으나 인간이라는 나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했다. 그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하여 신열을 위생하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귀처란 애초부터 알 수 없던 풍선들 대신에 머언 산령 위로 떠가는 솜덩이 같은 구름 쪽만을 지킨다.”

신동문(辛東門)시인의 대표 시 ‘풍선기(風船期) 1호’ 전문이다. 공군기지에서 기상 관측을 위해 수시로 풍선을 띄우는 것을 시어로 옮긴 것은 그가 공군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공기의 밀도가 희박한 고공으로 올라가면 이내 팽창하여 터져버리는 풍선. 그런 모습은 신 시인의 감성에 잡혀 풍선기 연작시를 탄생시키고 1956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선기’ (6~20호)가 당선되었다.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가 고향인 신 시인은 민병산과 함께 청주지역 현대문학의 씨를 뿌린 장본인이다. 청주시내 고교생 문학동아리 ‘푸른문 문학동호회’의 고문을 지내면서, 충북문화와 충북문학의 싹을 틔워 왔지만 진보적 취향의 글로 인한 관계기관의 핍박과 병마는 그를 괴롭혀 온 시인의 그림자였다.

1947년, 런던 올림픽 참가 후보선수로 선발되었다가 늑막염 발병으로 포기한 점 등은 그의 색다른 이력서이자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평소에 한강을 건너다닐 정도로 건장한 그는 외모와 달리 폐결핵과 평생 줄다리기를 하였다.

신 시인은 신경식 전국회의원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신 전의원이 문학도이었을 때 한번은 작은 할아버지가 쓰다 버린 원고를 주워 필명을 바꿔 모 잡지사로 보냈더니 심사평 왈 “신군은 조숙하다”라고 했다고 신 전의원은 밝혔다. 그 후로 할아버지의 책상 서랍에는 자물쇠가 채워졌다.

신 시인은 필화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두 차례 연행되었다. 연행 당시,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났기 때문에 절필하였다. 그 후 남한강이 흐르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정착하여 농장을 경영하며 주민들에게 침술을 무료로 시술, 주위에서 그를 ‘신 바이쳐’라 불렀다.

1983년~1985년에는 애곡리 수양개 구석기 유적이 충북대 박물관에 의해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당시 이융조 충북대 교수는 여러 학생들을 이끌고 이곳을 발굴하였다. 장기간 발굴을 하다보니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 다리를 삐는 사람에 자꾸 환자가 발생하였다. 병원은 멀고 사정은 다급해서 찾아간 곳이 신 시인의 집이다.

“당시 애곡리 땅값이 평당 1원밖에 안했어. 내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그가 단양읍내에 나오면 내게 전화를 했어, 바둑 한 수 겨루자는 얘기지 뭐, 그가 요주의 인물이라 주위의 눈치도 있었지만 난 신경 안 썼어, 그도 나한테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안했거든...” 전 충북도 기획실장 이승우 씨의 회고담이다. 이승우씨는 바둑이 아마 5단으로 신 시인과 맞수였다.

1993년 신 시인은 지병인 담도암으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1995년 단양의 지기들과 동양일보 등이 단양읍 수변공원에 신동문 시비를 건립하였다. 최근에는 청주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가경동 발산공원에 문학비를 세웠다. 생전의 글벗 민병산 문학비가 이웃하여 있다. 죽어서 비로소 자유인이 된 신동문, 그의 영혼은 ‘풍선기’처럼 끝없는 우주와 문학세계를 유영하며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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