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 2556주년 맞아 화려하게 부활
분서갱유등 역사상 수많은 수난 당해
국내외에 TV생중계…성대한 기념식


거리는 온통 축제열기로 가득했다. 도심 곳곳에 줄지어 서있는 반원형의 적청녹황(赤靑綠黃)의 대형아치와 플래카드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전국 각 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산둥성(山東省·산동성)의 인구 13만의 소도시 취푸(曲阜·곡부)는 9월 26일부터 보름동안 이어진 ‘2005 중국 취푸국제공자문화절’을 맞아 모처럼의 축제분위기에 들뜬 모습이었다.

도시 여기 저기에는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그 어찌 반갑지 않으랴)’라는 글귀가 관광객들을 따뜻이 맞고 있었다. 대형 야외극장에서는 공자를 테마로 한 화려한 전통무용극 ‘행단성몽(杏壇聖夢)’이 매일 저녁 성황리에 공연되고 공자묘(孔子廟)주변에는 때를 만난 민속품시장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세계 3대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2천수백년 동안 중국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해 왔으면서도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휘말려 인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던 공자는 올해 탄신 2556주년을 맞아 그가 난 고향 취푸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 단위로 치러지던 탄신행사는 올해 처음 전례 없이 국가규모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9월 28일 탄신일에는 중앙의 고위급 간부들이 북경에서 날아와 참석했고 관영 CCTV가 4시간에 걸쳐 한국 미국 독일 싱가포르 등 전 세계를 연결하는 다원방송으로 생중계를 함으로써 새로운 공자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했다.

▲ 원색의 공자 탄신 축하 아치가 줄지어 서 있는 취푸시내거리. 취푸는 온통 축제 분위기 였다. 사진=독자인 김두한 GMS대표 제공. 국가적인 행사로 새로운 공자시대 예고1970년대 중국 대륙에 휘몰아쳤던 문화대혁명의 최대 피해자는 공자였다. 비림비공(批林批孔·임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한다)운동이라 하여 공자에게 가해졌던 무차별 비판은 그의 사상자체를 깡그리 부정했고 구사상, 구문화, 구풍습, 구습관으로 대변되는 ‘사구(四舊)타파’운동의 상징으로서 타도대상 1호의 피해를 입었다. 비림비공운동이란 당시 권력투쟁의 한 축이었던 임표(林彪·린뱌오)와 함께 공자를 싸잡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운동을 말한다. 성난 군중들은 모택동의 후계자로 부상되던 임표를 극우반동 수정주의자로 몰면서 공자를 ‘봉건 노예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매도했고 공자사당에 불을 지르며 난동을 벌였다. 그 뒤 공자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인민들의 머리에서 점점 잊혀져 갔고 그의 고향 취푸 역시 빛을 잃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자가 수난을 당한 것은 문화대혁명 때만은 아니다. 이미 2200여 년 전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 분서갱유(焚書坑儒)가 그것이고 그 뒤에도 사회가 혼란할 때면 어김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었는데 20세기에 들어 와서도 1912년 신해혁명 때 소설가 루신(魯迅·로신)은 공자를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혹독히 비판했었다. ▲ 공자 탄신 2556주년을 맞아 취푸시가 만든 ’2005중국 취푸국제 공자문화절 포스터. 공자의 얼굴과 각종행사 사진이 보인다.
이상국가 실현 꿈꾼 인류의 스승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仁)과 예(禮)를 바탕으로 한 덕치주의(德治主義)이다.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덕치주의야말로 이상국가를 실현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이 공자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인 기원전 551년에노(魯)나라의 취읍(取邑), 지금의 취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구(丘)이며 자는 중니(仲尼)로 ‘공자(孔子)’의 ‘子’는 존칭이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위어 빈곤하게 자란 공자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했으나 젊은 날의 대부분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 불우하게 보낸다. 그는 50세가 되어 비로소 관직에 올랐지만 뜻을 펴지 못하고 56세 되던 해 제자들을 이끌고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길에 오른다.

공자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遊說·자신의 학문이나 사상을 주장하며 돌아다니는 것)를 거듭하면서 경륜을 펴려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년의 유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시경(詩經) 춘추(春秋)등을 정리하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쓸쓸히 여생을 보낸다. 이때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모아 적어 남긴 것이 바로 오늘 날 유학의 교본이 되고있는 ‘논어(論語)’이다.

공자는 기원전 479년 나이 73세 되던 해 어느 날 아침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읊는다.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려는가, 철인(哲人)이 시들려는가?” 그리고는 풀썩 주저앉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육예(六藝)를 통달한 자가 72명이고 제자를 자처하는 자만도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중국의 사상이라면 유교를 빼 놓고 논할 수 없고 유교하면 공자를 빼 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공자가 중국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또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북아 여러 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니 후세에 그를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라하여 왕후(王侯)에 준 하는 칭호로 존경을 표한 것도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공자는 문화대혁명이후 30여 년만에 그가 묻혀있던 무덤 속에서 나와 중국인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아니,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었던 것이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공자는 만대의 사표(師表)가 되어 인류의 스승으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 산둥성 취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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