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으로 열리던 전통의 상설시장 <임병무>

 청주의 재래시장은 약전, 남주동 일대의 목물전, 자유극장 부근에 있던 쇠전, 그 앞의 피전, 무심천변의 나무전, 육거리 시장 등이고 서문시장이나 중앙시장은 그후에 생겨난 것이다.

▲ 60년대 저자거리의 역술인 청주 읍성이 존재할 당시에는 남문(청남문)앞에 아침, 저녁으로 열리는 상설시장이 있었는데 이를 '저자시'라 했다. 장꾼들은 통상, 이곳을 '제작거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저자거리'의 쉬운 발음으로 '저자시'에서 유래한, '저자거리'가 올바른 표현이다. 저자시는 청주에만 열렸던게 아니라 읍성이 있던 곳이면 모두 성문밖에 존재하였다. 이는 평민들의 물물교환 뿐만 아니라 읍성안의 관급 물자 조달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여타 시장이 닷새만큼 열리는 5일장에 비해 저자시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열린 상설시장이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침해가 뜨기 이전인 인시(寅時:오전4시~6시)말쯤 열려 한 두시간 북적거리다 묘시(卯時:오전6시~8시)무렵에 파장이 되었다. 저녁 나절에도 잠깐 열렸다가 파시했는데 아침 장이 저녁 장보다 규모가 컸다.현재 중앙공원 앞, 조흥은행 앞 시장바닥이 바로 청주읍성의 저자시가 열렸던 곳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해진 저자시이나 이 곳의 저자시는 청주읍성의 명운과 함께 번성하고 쇠락했다. ▲ 질마를 메운 소를 끌고 장으로 가는 모습
무려 7~8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청주 저자시가 청주읍성이 일제에 의해 헐리면서 시들해졌고 유통구조가 바뀐 요즘에는 그냥 이름만 전해질 뿐이다. 10여년전 까지만 해도 중앙공원 정문 앞에는 저자시의 잔영이 있었다. 현재청송통닭자리에는  떡전이 있었는데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80년대까지 존재했던 떡전에서는 인정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기주떡, 시루떡, 인절미, 송편 등이 장꾼의 허기를 달랬다. 남주동 시장 초입에서 행상(行商)의 얼요기를 채웠던 떡전은 무슨 캔디 등 양(洋)과자가 범람하는데다 그 앞을 지나는 남사로가 확포장되면서 슬그머니 종적을 감췄다.

떡전 아래로 남주동 골목의 잡화전과 혼수가게, 그리고 수산협동조합 등 어물전이 꼬리를 물었으나 수산시장이 운천동으로 이사를 간 후, 어물전 경기는 시들해 졌다. 구 도립병원(현 만복회관)일대에는 운명철학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대부분 노쇠한데다 컴퓨터 사주, 토정비결 등의 등장으로 이 역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때 청주시에서는 도시미관을 해친다하여 이들의 철거를 여러번 시도해 봤지만 결국 담당 공무원이 와이셔츠만 찢기는 수난을 겪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 읍성밖저자거리(남사로 확장직전의 중앙공원 앞) 지금은 만복회관 옆에서 중앙공원으로 통하는 골목길에 서너명의 역학인이 쪼그려 앉아 있는데 경기가 영 신통치 않다는 표정이다. 혼기를 앞둔 묘령의 처녀가 그 중 용하다는 맹인 역학가에게 신수를 점친다. 우선 복채를 내라고 하더니 생년월일을 묻는다.'깊으신 운명 밝혀주옵소서...'6괘점이라고 불리는 이 점은 주문을 외며 산통을 한참 흔들어 대더니 이윽고 점괘를 풀이한다. '정 이월에는 길흉이 상반되고 무해 무덕하나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성공하며 3, 4 월에는 날지 못하는 기러기가 날개를 얻고 얕은 물에서 놀던 고기가 깊은 물에서 놀며 5, 6월에는 구설수에 오를 수이고 7, 8월에는 고목에 비가 오니 매사가 여의하다...' ▲ 1920년대 청주장날모습(남주동 시장)
청산유수로 읊어대는 점괘에 혼기 찬 처녀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귀를 기울인다. 장꾼들의 발길로 늘 시끌벅적하던 읍성 밖 저자거리는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재래상가는 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청주읍성 성벽이 지나가던 자리인 청주YMCA 앞, 길 건너편에는 아직도 일제의 적산가옥이 몇 채 눈에 띤다.

이 일대를 지나던 하수도가 복개되기 이전에는 염색공장이 있었고 학생복 단체주문을 받던 옷가게도 여러 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유통구조의 변화에 따라 성문앞 저자거리는 이따금 사람들의 입에서 머무는 정도이다. <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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