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재래시장은 약전, 남주동 일대의 목물전, 자유극장 부근에 있던 쇠전, 그 앞의 피전, 무심천변의 나무전, 육거리 시장 등이고 서문시장이나 중앙시장은 그후에 생겨난 것이다.
무려 7~8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청주 저자시가 청주읍성이 일제에 의해 헐리면서 시들해졌고 유통구조가 바뀐 요즘에는 그냥 이름만 전해질 뿐이다. 10여년전 까지만 해도 중앙공원 정문 앞에는 저자시의 잔영이 있었다. 현재청송통닭자리에는 떡전이 있었는데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80년대까지 존재했던 떡전에서는 인정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기주떡, 시루떡, 인절미, 송편 등이 장꾼의 허기를 달랬다. 남주동 시장 초입에서 행상(行商)의 얼요기를 채웠던 떡전은 무슨 캔디 등 양(洋)과자가 범람하는데다 그 앞을 지나는 남사로가 확포장되면서 슬그머니 종적을 감췄다.
떡전 아래로 남주동 골목의 잡화전과 혼수가게, 그리고 수산협동조합 등 어물전이 꼬리를 물었으나 수산시장이 운천동으로 이사를 간 후, 어물전 경기는 시들해 졌다. 구 도립병원(현 만복회관)일대에는 운명철학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대부분 노쇠한데다 컴퓨터 사주, 토정비결 등의 등장으로 이 역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때 청주시에서는 도시미관을 해친다하여 이들의 철거를 여러번 시도해 봤지만 결국 담당 공무원이 와이셔츠만 찢기는 수난을 겪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청산유수로 읊어대는 점괘에 혼기 찬 처녀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귀를 기울인다. 장꾼들의 발길로 늘 시끌벅적하던 읍성 밖 저자거리는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재래상가는 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청주읍성 성벽이 지나가던 자리인 청주YMCA 앞, 길 건너편에는 아직도 일제의 적산가옥이 몇 채 눈에 띤다.
이 일대를 지나던 하수도가 복개되기 이전에는 염색공장이 있었고 학생복 단체주문을 받던 옷가게도 여러 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유통구조의 변화에 따라 성문앞 저자거리는 이따금 사람들의 입에서 머무는 정도이다. <임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