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옛말은 지금도 동서고금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거의 모든 역사 속에서 영웅은 미인을 탐했고, 미인은 영웅을 유혹했다. 중국에서는 ‘영웅은 미인을 사랑하고, 미인은 영웅을 망친다’(英雄愛美人, 美人誤英雄)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최근 연예계 비리 수사 과정에서 일부 권력층 인사와 연예인의 섹스스캔들(혹은 ‘성 상납’)이 터져 나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권력과 섹스’의 문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도 권력과 섹스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당대 톱스타를 비롯한 연예인들은 권력과 섹스를 이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요정’이나 ‘룸살롱’ 등의 고급술집이 놓여 있었다.

연예인 매춘, 60년대부터
정계에서 재계로 확대

50년대에는 주로 정계 실력자들과 연예인 사이에 섹스스캔들이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매춘’이라기보다 ‘성 상납’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대표적인 인물은 역시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손꼽히는 C씨였다.
군사정권 시대였던 60년대에는 특히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에 힘입어 ‘재벌’이라는 대기업집단이 등장하면서 권력의 섹스스캔들도 정계 실력자들에서 재계 유력자들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자면 재벌 회장들도 연예인 매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는 것.
당시 권력과 연예인 간 섹스스캔들의 중심에는 ‘여배우 트로이카’ 전성기를 구가하던 E씨와 M씨 등이 있었다. E씨는 특히 재계뿐만 아니라 70년대 초반까지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대통령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항간에서는 “박 대통령과 E씨의 관계를 육영수 여사가 알고 자주 부부싸움을 벌였으며, 박 대통령이 재떨이를 집어던져 육 여사의 얼굴에 멍이 들어 한동안 대외활동을 중단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마저 돌았다. 그리고 M씨는 당시 H일보 회장 아들과 사귀다가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70년대는,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50∼60년대의 최고급 연예인 매춘이 중간급으로까지 확대되는 시기”였다. 즉 “정계·재계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돈만 있으면 연예인 매춘이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얘기다. 돈이 좀 많아 회장이나 사장으로 행세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연예인들과 ‘하룻밤‘을 잘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부의 증가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당시 연예인 매춘 리스트에는 J씨, Y씨, J씨, K씨, H씨, H씨, K씨, Y씨, K씨, J씨 등이 올라와 있다. 영화배우와 가수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당시에는 여배우들이 ‘간통죄’로 철창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백치미’의 탤런트 Y씨는 79년께 양말공장 사장과 ‘장기간 관계’를 맺었다가 사장의 아내에게 발각되어 쇠고랑을 차기도 했다. 탤런트 K씨와 H씨도 처녀시절 간통죄로 고소 당한 적이 있다. 특히 K씨는 75년께 중소기업 사장과 ‘관계’를 맺다가 간통죄로 고소 당해 철창신세를 졌는데 감옥에서 나온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70년대에는 재벌가의 섹스스캔들도 만만치 않았다. S그룹 회장 L씨(작고)와 H그룹 회장 J씨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특히 J씨의 여성 연예인 편력은 매우 심했다. J씨와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진 연예인으로는 H씨, K씨, Y씨, J씨, K씨, K씨 등이 손꼽히는데 영화배우·탤런트·가수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70년대 권력의 섹스스캔들의 정점에는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특히 육영수 여사와 사별한 후 ‘육탐’(肉貪)이 커져 여성편력이 매우 심해졌다고 한다. 결국 중앙정보부에서는 대통령 전용 ‘채홍사’를 두었고, ‘궁정동 행사’도 한 달에 8∼10회 치렀다. 대통령·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그리고 두 명의 여자가 참석하는 ‘대행사’와 대통령·비서실장·경호실장과 1명의 여자가 참석하는 ‘소행사’가 있었다. 당시 박선호 정보부 의전과장의 임무는 바로 ‘대통령의 밤행사’를 은밀하게 치르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죽기 전에 치른 ‘궁정동 행사’에도 두 명의 여자가 참석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유명가수 S씨였다. ‘궁정동 행사’에는 대부분 연예인들이 참석했는데 대개 고급 요정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박 대통령이 TV를 통해 “쟤 한번 데려와” 하면 청와대 비서실에서 곧장 달려가 데려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웅은 미인을 사랑하고, 미인은 영웅을 망친다’고 했는데 박 대통령은 부하의 총에 죽음으로써 ‘유신독재’도 막을 내렸다.

80년대 3S정책과
연예인 매춘의 보편화

또 다른 군부정권 시대였던 80년대에는 연예인 매춘이 매우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연예인들의 홍보비용이 증대하면서 과거 강요나 억압에 의한 측면이 사라지고 ‘자발적 매춘’이 만연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80년대는 연예인 매춘이 대중화를 모색한 시기”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군부정권의 3S정책(Screen·Sex·Sports)이 은밀하게 연예인 매춘을 합리화한 측면도 없지 않다.
당시 최고권력자가 연루된 ‘X양 사건’은 매우 유명했는데 이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X양 사건’의 주인공은 70, 8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군림했던 J씨였다. J씨 외에도 M씨, K씨, H씨, K씨, K씨, W씨, W씨, L씨, K씨 등이 연예인 매춘 리스트에 오르내렸다. 특히 몇 년 전 벤처기업 사장과 결혼한 탤런트 K씨는 정·재계 최고위층과의 관계를 통해 톱스타로 성장했다고 한다. K씨는 특히 80년대 ‘권력의 황태자’였던 P씨를 ‘스폰서’로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K씨의 스폰서였던 P씨는 최근 드라마에서 유부녀로 열연한 H씨와도 관계가 깊었다고 한다.
한편 재벌가 여성들이 남자 연예인들과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 연예가와 정가에 나돌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중견 트로트 가수인 T씨는 70년대 재벌가 여성과의 섹스스캔들 때문에 간통죄로 고소를 당해 결국 미국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또 S그룹 회장 아내인 H씨는 중견 탤런트인 P씨를 자주 불러 함께 논 것으로 알려졌다.
90년대에는 연예인 매춘이 은밀화한 반면, 연예인들간의 섹스스캔들이 일반화됐다. J씨, C씨, E씨, J씨, K씨, K씨, L씨 등이 대표적이다. 글래머 탤런트인 K씨는 D그룹 회장 아들과,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여배우 K씨는 H그룹 회장 아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들이 신빙성 있게 제기되었다. 또한 탤런트 L씨와 섹스비디오사건으로 화제가 됐던 O씨는 H그룹 회장 P씨과의 관계설이 나돌았다. 특히 O씨와 P씨가 괌으로 놀러간 장면은 주간 옐로우페이퍼에 포착되기도 했다.
당시 유력 인사와 연예인간의 ‘하룻밤 화대’는 보통 몇백 만원에서 몇천 만원까지 이른다고 했다. 물론 집(부동산)이나 자동차 등으로 보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재작년 “한국 연예산업에서 활동하려면 뇌물·섹스·정치적인 영향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80년대부터는 미스코리아출신들이 권력층과의 섹스스캔들에 자주 휘말렸다. 79년 미스코리아출신인 영화배우 겸 탤런트인 H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씨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또 80년대 후반 미스코리아출신인 J씨는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상류층 인사들과의 매춘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J씨는 S은행 오너의 조카와 결혼했지만 ‘과거’의 일이 밝혀져 이혼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86년 미스코리아 출신인 K씨는 ‘요정에 출입했다’는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에는 90년대 후반 미스코리아 출신인 S씨 자매의 ‘연예인 성 상납’ 의혹이 제기돼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권력과 섹스가 ‘미모’를 통해 교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90년대 이후 연예인 매춘의 특징 중 하나는 역시 에로배우들이 매춘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현재 에로배우 겸 MC로 활약중인 정세희씨는 “백지수표 제의를 받았다”고 고백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마고’에서 알몸 연기로 열연한 김지우씨도 “최근 한 연예기획사로부터 정치인에 대한 성 상납 요구를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벤처붐이 일면서 일부 벤처기업 사장과 연예인의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고 실제 결혼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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