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조선조 5백년을 통틀어 중국의 주자(朱子)에 비견, 송자(宋子)라 부른 사람은 오직 그뿐이다.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우두머리이자 서인, 노론의 영수로 학계와 정계를 주름잡은 송시열은 조선조의 으뜸 선비로 꼽을 만 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천 번이나 등장하는 송시열. 그의 학문세계는 가히 주자에 맞닿아 있고 성리학을 통한 도덕정치의 실현은 숱한 풍상을 겪으면서 한 시대 역사의 행간을 선비정신으로 도배하였다.

1,2차에 걸친 예송논쟁(효종, 효종비 승하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복상문제), 서인과 남인과의 반목, 노론 소론의 갈등 속에서 권력의 정점에 섰다가 내려앉기를 여러 번 거듭한 나머지 당상관과 귀양길을 수시로 넘나든 그는 학자와 권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한 보기 힘든 인걸이다.

장희빈 소생의 세자책봉이 너무 이르다 하여 숙종의 미움을 사 제주도 귀양길에 정읍에서 사사되기까지 80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그는 수백 년이 지났건만 조선조 성리학의 버팀목이요 충청도 선비의 표상이다.

그는 낙향을 하면 으레 산자수명한 화양동 계곡을 찾았다. 하늘을 고일 듯한 바위위에 정자를 짓고 암서재(巖棲齋)라 일컬으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우암의 제자는 9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중 당상관 벼슬에 오른 자만해도 40여명을 헤아린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우암의 제자 권상하 등에 의해 지었다. 화양서원은 일종의 사학교육기관이었지만 서인, 노론의 정치적 기반이었으며 그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제향을 올릴 때면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하여 현감, 부호에게 제수를 찬조케 하였는데 일종의 고지서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시골 지역으로 좌천을 시키기 일쑤였고 양반들에게는 사형(私刑)을 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한번은 이곳에 왔다가 망신을 당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대원군은 하마비(下馬碑)에서 내리지 않았다가 하인에게 혼이 났으며 만동묘 좁은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올랐다가 하인에게 턱을 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훗날 대원군이 집권한 후 화양서원은 서원철폐의 1호 대상이었는데 이는 서원의 악습도 있었지만 여기서 망신을 당한데 대한 앙가픔의 심리도 작용했던 것이다.

충청지역에는 우암선생과 연관된 설화가 여러 편 전한다. 우암은 공부할 때 등잔불을 켜지 않은 기인이었다고 하며 김집(金集)선생에게 공부할 때는 여우 구슬을 먹고 훌륭한 문장가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우암이 늦은 봄날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데 근처 연못에서 맹꽁이가 심하게 울어댔다. 견디다 못한 우암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르자 한 여름이 지나도록 맹꽁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암의 13대 종손인 송영달 씨는 최근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던 우암 선생의 유품 250여건 540점을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하였다. 우암의 제자인 권상하가 저술한 것을 정조 때에 증보한 ‘송자대전’ 112점을 비롯하여 화양서원 향약, 정조의 어필, 우암선생이 생원시에서 장원한 과거문답지, 주자와 송자의 학문 사상을 비교한 양현전심록, 딸을 시집 보낼 때 여자의 길을 일러준 계녀서, 효종이 북벌을 도모하며 하사한 담비 가죽으로 만든 방한복인 ‘초구’, 우암 선생의 관복, 책상, 목침 등이다. 이같은 기증품이 길이 충청의 선비정신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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