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어머니도, 우리 자식들도 바랬으나 이렇게 시체로 오시다니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남파간첩 출신 장기수 정순택씨가 2일 오후 6시37분께 생전 소원이던 북송을 저승에서 이루며 1958년 남파된 뒤 48년여만에 꿈에도 그리던 가족의 품에 안겼다.

지난 달 30일 오후 6시50분 사망한 뒤 약 48시간만이다.

정씨의 장남 태두(김책공업종합대 선박공학부 교수)씨는 이렇게 아버지를 맞았다.

태두씨는 아버지의 시신을 접한 이날 이렇게 밝힌 뒤 "말씀드릴 게 (더 이상) 없습니다"라며 말을 맺었다고 우리측 한 참석자는 전했다.

9세 때 아버지와 헤어진 뒤 태두씨가 견뎌야 했던 이산의 세월은 이미 그의 눈물마저 앗아가 버렸지도 모른다.

태두씨의 이런 반응은 이미 정씨가 2000년 9월 1차 장기수 북송에서 아버지가 포함되지 않으면서 생긴 안타까움에 이어 이번에 싸늘한 시신으로 아버지를 맞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태두씨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2000년 8월12일 평양방송에 출연, "꿈이 아닌 현실로 펼쳐지게 될 아버지와의 상봉을 날을 앞두고 하루가 천날 맞잡이로(같이) 길어 보이는 것만 같고 그저 하루에도 열두번식 달려가 만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재회를 학수고대했던 정씨의 입장에서는 주검이 된 이날도 애초 예상했던 인도 시간인 오후 4시에서 2시간30분 이상을 또 기다려야 했다.

평양에서 달려온다던 아들의 도착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미 해가 떨어진 뒤였다.

이런 인도 행사는 오후 6시37분을 전후해 불과 5분만에 끝났다.

이 때문에 '썰렁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북측에서는 현장을 찍거나 취재하는 기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북측에서는 태두씨와 북측 연락관 2명, 운구요원 6명이 나와 시신을 인수한 뒤 별도의 앰뷸런스 없이 소형 버스를 이용해 북측으로 운구해 갔다.

앞서 정부의 시신 송환 결정으로 이날 오후 1시45분께 정씨 시신을 실고 서울 보라매병원을 출발한 앰뷸런스는 경찰차 2대 등의 인도를 받으며 자유로를 거쳐 오후 3시15분께 판문점에 도착했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들은 판문점 도착 직후 자유의 집 1층 로비에서 시신과 함께 북측에 건넬 정씨의 유품을 확인했다.

유품은 대형 여행용 가방과 회색 손가방, 라면박스 크기의 상자 1개였다.

손가방 안에는 '정순택 선생님이 반미 시위 때 들어다녔던 가방'이라고 메모와 함께 흰색 중절모와 수건, 벨트, 속옷, 셔츠, 사진 등이 들어 있었다.

사진 20여장 중에는 정씨가 생전에 시위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흰 상자 겉면에는 "통일애국열사 정순택 선생님 유품입니다. 유리액자가 들었으니 조심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정부 관계자는 "북측이 사전 협의과정에서 유품 중에 문제가 되거나 (남측이) 불편한 게 있으면 임의 처리해도 된다는 입장을 알려왔다"며 "그러나 특별히 문제되는 게 없어 모두 유족에게 인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앞서 앰뷸런스가 판문점에 가까운 통일대교 남단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이 정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정씨는 북측에서 장례절차를 거쳐 남측의 국립묘지격인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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