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에 마모된 병사(兵使)의 실비명 <임병무>

 신작로(新作路)라는 말은 일본식 조어(造語)여서 가급적 안 쓰는 것이 좋다. 일제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기존의 옛 길을 확장하거나 방향을 틀어 샛길을 냈는데 이는 개발이라는 허울 속에 한반도 및 대륙침략을 겨냥한 속셈을 감춘 것이다.

 이러한 일본식 용어는 광복 후, 60~70 연대까지도 별다른 의식의 저항 없이 보편적으로 쓰여졌다. 이미자의 노래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보면 노래가사 중에 '바람 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 그리움은 쌓이는데...' 식으로 되어 있다.

 이제는 '신작로'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 이는 의식의 전환에서라기 보다도 아스팔트, 페이브먼트, 또는 도로 확포장, 고속도로, 하이웨이 등 새 개념의 길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작로가 됐든, 하이웨이가 됐든, 길은 길이다. 도로(道路)는 한자식 표기이고 하이웨이는 영어 아닌가. 우리 조상들이 오가던 길은 신작로도, 하이웨이도 아닌 그냥 길이었다.

그 옛 길은 아스콘 냄새가 물씬 나는 물질문명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옛 길이라고 해서 무작정 오솔길이었거나 길폭이 좁은 소로(小路)로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옛 길이 오늘날 6차선, 8차선보다 좁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엄연히 국도요, 사람은 물론 우마차가 통행하던 곳이었다.

보은에서 청주에 이르는 옛길은 미원(米院)을 거치는 것보다 피반령을 넘어 회인~청주를 연결하는 코스가 일반적이었다. 피반령을 숨차게 넘어온 남도 과객은 방서동에 이르러 목을 축인후 선도산 자락을 따라 봉화뚝을 넘어 청주의 수문장격인 상당산성에 도착했었다.

여기서 청주로 가려면 것대산(거질대산) 상봉재를 넘어 명암지 뒤편으로 작로했고 청주를 거치지 않고 논 스톱으로 오창, 진천 방향으로 가려면 상당산성 서문을 통과하여 율봉역(栗峰驛:율량)으로 길을 잡았다.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옛 길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진달래가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더니 어느새 연분홍 꽃잎을 땅에 떨구고 철쭉, 조팝나무 등이 바통을 이어받아 봄의 중간을 소리없이 내달렸다.

▲ 것대산 봉수터 단순한 등산객이라면 그 꽃길에서 꽃 내음만 맡을 터이고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한 역사의 향기에 취해 아마도 혼절할 것이다. 상당산성 남문에서 것대산 중간까지는 경운기가 간신히 다닐 정도의 길이었는데 요즘에 패러글라이딩 활공으로 정상까지 차도(車道)가 뚫렸다.숨차게 상봉재를 오르면 것대산 봉수터가 나온다. 것대산 봉수터는 문의(文義) 소이산(所伊山)에서 신호를 받아 진천 소흘산으로 봉수를 넘겨 주었다. 봉수는 불과 연기로 적군의 침입 등 위급상황을 알리던 조선시대의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냈는데 그 숫자의 범위에 따라 위급상황의 정도를 달리했다. 만약 봉화가 4~5개 오르면 오늘날의 데프콘 3로 전시체제에 돌입했다는 뜻이다.이처럼 유서깊은 것대산 봉수터에 언젠가 어느 문중에서 명당이라 하여 묘를 썼으니 이 또한 문화유산의 공유 개념을 잃은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것대산 봉수터에 서면 청주의 남쪽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용암동, 분평동 아파트 단지가 가물거리고 농사채비를 차리는 남들 벌판에 아지랑이가 굼실대며 야산 등성이로 기어오른다.아하,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먼데 것은 잘 보이나 여기서 명암지로 빠지는 청주 옛 길은 종적을 찾을 수 없다. 몇 년전만 하여도 나무꾼들이 듬성 듬성 지나가 오솔길의 체면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땔감이 경유나 LPG로 바뀌면서 마른 삭정이를 주워 가는 사람도 없다.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다보니 칡덩쿨, 잡목이 오솔길을 점령해 이 곳을 답사하자면 여간 애를 먹는게 아니다. ▲ 청주 옛길 변 자연암석에 새겨진 병마 절도사 송덕비
상봉재 오른 편으로 꺾어들어 한참을 가다 칡넝쿨을 헤쳐보니 암벽에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송덕비가 숲속에 잠들어 있다. 그것도 1~2기가 아니라 무려 10여기에 달하는 송덕비가 옛 길을 따라 도열을 하고 있다.

비신(碑身)을 따로 마련치 않고 자연 암벽에 돋을새김(양각)과 음각을 병행하여 송덕비를 만든 형태는 전국적으로 봐도 매우 희귀한 일이다. 학계에조차 공식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낯선 문화재(?)로 이 존재를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다. 

이 송덕비(頌德碑)는 상당산성에 기거했던 병마절도사의 공로를 기리는 비석이다. 자연암벽을 이용하여 비석의 지붕은 돋을 새김 형식으로 만들었고 비문은 음각을 했다. 비문은 풍파에 깎이고 더러는 기자(祈子)신앙에 상처를 입어 제대로 판독할 수 있는 비문이 거의 없다.

기자 신앙이란 말 그대로 아들 낳기를 비는 주술적 바람이다. 비문 가운데 특히 사내 남(男)자나 수컷 웅(雄), 호반 무(武)자 등은 기자 신앙의 주공격 대상이다. 이는 사내아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인네의 의식속에 변용(變容)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글자를 파내어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비문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게다가 상당산성에 기거했던 무관(武官)의 송덕비이므로 기자신앙의 피해가 더욱 컸으리라 짐작된다. 씩씩한 사내아이를 낳기 바랐던 여인네들의 소망은 성취되었을지 모르나 그 통에 비문은 제 꼴이 아니다.

송덕비는 다른 말로 불망비(不忘碑), 공덕비(功德碑) 등으로 불리운다. 모두 비슷 비슷한 뜻인데 이 곳에는 '불망비'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등장한다. 병마절도사의 치적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10여기의 불망비중 완전히 판독할수 있는 비문은 1~2기에 불과하다. 兵使 田文顯 不忘碑는 풍파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였다. 그외는 비문의 일부만 알아 볼 수 있는 정도다. 불망비는 대개 병마절도사가 그 주인공이나 더러는 병마절도사우후(兵馬節度使虞侯)의 것도 더러 눈에 띈다.

우후(虞侯)라는 꼬리표는 병마절도사 바로 밑의 벼슬인데 병마절도사가 없을 경우엔 그 직책을 대행했다. '兵馬虞侯李公光O永世不忘' 이라는 우후의 불망비도 판독되었으나 중간에 한 글자가 떨어져 나갔다.

이러한 비문의 행렬은 조선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금석학적인 가치와 더불어 이곳이 청주 옛길이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말해준다.

세월의 더께를 머리에 이고 조선소나무와 칡덩쿨 속에 숨어 있는 송덕비는 찾아주는 이 없이 쓸쓸히 오솔길을 지킬 뿐이다.

역사의 이정표로 변해버린 고갯마루의 실비명(失碑酩)들. 그속에 숱한 역사의 영욕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오가는 길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산행을 하다 이정골에서 왔다는 어느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약초캐는 일로 소일을 하는데 이 고개에 얽힌 전설을 많이 알고 있었다.

   
▲ 청주문화원 유적답사반이 것대산 봉수터에서 명암지에 이르는 청주옛길을 답사하고 있다.
그가 들려준 '큰 애기 바위'전설은 너무도 애달팠다. 어느날 과객이 이곳을 지나다 어느댁 규수를 강제로 겁간하고 살해한후 건너편 것대산 중턱에 묻었다고 한다. 그 규수는 그때의 원혼이 사무쳐 지금도 '큰 애기'를 부르면 맞은편 산에서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계곡사이에 두 산이 마주보고 있어 되돌아 오는 메아리가 유난히 크다. 이러한 현상이 큰 애기의 원혼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전해듣고 있다. 그래서 이 전설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ꡐ큰 애기ꡑ하고 소리치면 메아리가 대답을 한다.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전설과 결합하여 또다른 얘기거리를 만든 것이다.

큰 애기 전설을 뒤로하고 가시덩굴을 제치며 산 모퉁이를 돌아드니 여기에는 '아들바위' 전설이 또 이야기 보따리를 끄른다. 높이 10여m의 암벽위에 오목하게 들어간 곳이 있는데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곳에 와서 왼 팔매로 돌을 던저 오목한 곳에 돌을 얹어야 하고 오른 팔매로는 50m 떨어져 있는, 차돌이 있는 ꡐ차돌배기ꡑ를 넘어야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비석을 쪼아 먹던 기자신앙과 더불어 청주읍성으로 통하던 역사의 길목에는 아직도 여러 전설이 얽히고 설켜 있다. 멧꿩이 푸드득 날자 개망초, 할미꽃이 몸을 떨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면서 계절은 여름으로의 행군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다 몰라도 들꽃들은 청주 옛길의 수많은 사연을 알고 있을 것이다.

청주 옛길은 앞으로 확포장될 모양인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도로 확포장 공사 과정에서 상당상성과 청주읍성의 이정표격인 병마절도사 송덕비가 행여 문명의 상처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개발도 좋지만 역사의 오솔길을 잘 보존하는 것도 우리 고장의 역사문화를 가꾸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불가피하게 도로를 낸다해도 전통과 어울리는 개발방식을 선택했으면 한다. <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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