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빛나고 번창하라는 뜻의 돈황
중국의 천년고도였던 서안에서 서쪽으로 약700㎞지점인 감숙성의 성도 난주에 이르면 팍팍한 황토고원과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흙탕물 황하를 만나게 된다. 황하상류인 이곳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면 본격적인 실크로드 여행이 시작된다. BC111년 흉노를 제압한 한무제는 서역경영을 위해 황하서쪽지방에 하서4군을 설치하였는데 실크로드에서 거점이 되었던 오아시스도시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도시는 실크로드상에서 200∼300㎞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었다.
무위는 황하이서 지역의 첫 오아시스도시로 옛날 능묘등 고대유적이 많고 장액은《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폴로가 1년간 머물렀던 곳으로 불교가 번창했던 곳이다. 그리고 주천은 흉노와의 전투에서 공이 컸던 청년장군 곽거병이 주둔했던 곳으로 출전에 앞서 무제가 하사했던 술을 샘에 부어 주천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마시게 했던 일화로 유명한 곳이다. 서역4군의 가장 서쪽기지가 돈황이었다. 청 건륭제때인 18C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중국에 귀속된 신강지역과의 접경지대였던 돈황의 서쪽지방은 오늘날에도 유목민족들의 비중이 크고 그들의 전통풍속이 강하게 남아 있다. 돈황은 크게 빛나고 번창하라는 이름 뜻 그대로 동서문화가 만나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화융합의 전진기지였다. 후한 명제때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불교가 이곳에서 중국옷을 입고 중원으로 전파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막속에 뜬 달 명사산의 월아천
기련산맥의 눈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든 것을 개발하여 조성한 오아시스도시 돈황의 남쪽 4㎞지점에 사막과 샘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명승지가 바로 명사산과 월아천이다. 우는 모래산이란 별난 이름이 붙은 이 산 입구에 도착하면 쌍봉낙타들이 관광객을 태워 월아천 못미친 곳에 있는 모래썰매언덕으로 안내한다. 멀리서도 그 자태가 선명한 명사산은 부드러운 모래더미 위로 완만하게 솟은 모래산의 등선이 칼날같이 날카로와 어떻게 모래산에서 저렇게....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낙타에서 내려 약60-70m높이의 모래언덕에 올라 대나무로 만든 썰매를 타고 내려오면서 양손을 스틱삼아 모래속에 집어 넣었다 뺐다 하면서 내려오는 기분은 참 푸근하다. 이 지역사람들은 단오날 이 산에 올라 미끄럼을 타는 풍속이 유행했다고 한다. 여러사람이 한꺼번에 미끄러져 내려오는 소리가 우뢰같다하여 명사산이라 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옛날 이 지역에 강풍이 불어 야영하던 군대가 송두리째 매몰되어 버렸다. 그후부터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땅속 어디선가 군대의 북과 나팔소리가 들려와 명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래썰매장에서 조금만 걸으면 천년동안 한번도 마른적이 없다는 신비의 샘 월아천이 살포시 자태를 드러낸다. 월아란 초승달이란 뜻이니 샘의 생김새와 청초함에 꼭 어울리는 이름이다. 명사산을 휩쓸고 다니는 모래바람도 월아천 언저리에 와서는 회오리를 일으키면서 샘에는 모래를 뿌리지 않고 주변 둔덕에다 운반해온 모래를 뿌리곤 사라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사막으로 둘러싸인 월아천 물속 수초 아래로는 그 연원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조그만 물고기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어 그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월아천의 신비로움은 더해만 간다. 달밤의 월아천 유람은 얼마나 더 신비로울까를 생각하는 사이에 버스는 어느새 명사산 동쪽끝 절벽에 펼쳐진 막고굴에 도착해 있다.

다시 깨어난 사막속의 천년 동굴 막고굴
막고굴은 돈황 동남쪽 25㎞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절벽에 굴을 뚫어 법당과 승방을 만들어 예배와 수도를 하던 곳이다. 사막의 높은 지대에 뚫은 굴이라 하여 막고굴이라 하고 굴이 1천여개라 하여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4C부터 14C에 걸쳐 조성된 이 굴은 현재 492개굴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한 굴속에 있는 작은 굴들까지 포함된 숫자여서 실제 남은 굴수는 훨씬 줄어든다. 그속에는 사막의 불교화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갖가지 내용과 현란한 색상의 불화와 아름다운 소상 다양한 굴양식등 1천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찬란한 불교미술품으로 가득하다. 송대까지 번성했던 돈황은 남송이후 사막으로 난 실크로드의 쇠퇴와 함께 잊혀져 갔다. 그러다 1900년무렵 왕원록이라는 도사가 현재 17호굴로 명명된 굴에서 대량의 고문서를 발견하여 세계각국의 탐험가, 학자들이 몰리면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굴에서는 불교경전만이 아니라 시경, 서경등의 유교경전, 노자, 열자등의 제자문헌 사기, 한서등의 사서까지 원본에 가까운 필사본 형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신라승려 혜초가 불교왕국인 천축국(지금의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에 다녀와 남긴《왕오천축국전》필사본이 발견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불교경전을 기록한 종이의 뒷면에 당나라와 그 이전시대의 호적제도와 토지제도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당시 사원이 관청에서 보존기한이 지난 호적기록부를 불하받아 그 뒷면에 불전을 적은데서 연유한다. 종이의 재활용이 천수백년이 지난 후 이렇게 귀중한 사료가 될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볼거리도 이야기거리도 무궁무진한 막고굴도 내년부터는 문화재보호를 위해 굴입구에 조성해 놓은 모조굴 관람만 허용한다고 한다.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더 느긋하게 보지못한 아쉬움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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