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50대 이상의 장·노년층들은 심기가 몹시 불편합니다. 그러잖아도 사회가 시끄럽고 어수선한 와중에 때아닌 맥아더동상 철거논쟁이 뜨겁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6·25전쟁 때 몇 차례씩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남은 이들에게 맥아더야말로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은인중의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정치에 대해 말수가 적은 이들조차 “맥아더가 잘못이라면 6·25때 공산화됐어야 한다는 말이냐”고 철거론 자들을 격렬히 비판합니다.

1880년 미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태어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타고 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함으로써 일찍부터 천부적인 군인의 면모를 보입니다.

1917~19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3개의 훈장을 휩쓴 맥아더는 1930년 대장으로 승진, 육군참모총장에 오름으로써 군인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2차 대전 때는 아시아와 태평양을 누비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명성을 날립니다.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대장에 오르고 미 육군사상 4명밖에 없는 원수가 되는 등 갖가지 최초, 최고의 기록을 쌓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를 세계전사에 남게 한 것은 1950년의 한국전쟁입니다. 70세의 노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풍전등화에 처했던 한국군을 회생시키고 북한 인민군을 일망타진의 궁지로 몰아 넣음으로써 ‘전쟁영웅’으로서의 금자탑을 세웁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해 전세가 역전되자 만주폭격을 감행해 전쟁을 확대하려했고 이것이 본국정부와 마찰을 빚어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돼 본국으로 소환됩니다.

미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맥아더는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군을 떠나는 마지막 고별연설을 합니다.

“나는 젊은 시절 인기 있던 군가의 한 구절을 아직도 외고 있습니다. 그 가사는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사라져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 군가의 노병과 같이 나의 군인 생활의 끝을 맺습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 하려고 노력하였던 한 노병은 지금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은퇴 뒤 맥아더는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채 1964년 향년 84세로 워싱턴에서 숨을 거둡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 한 것일까, 그는 눈을 감기 2년 전 모교인 웨스트 포인트를 찾아 후배생도들에게 마지막 명언을 남깁니다.

“황혼이 닥쳐 왔도다. 나는 아득하게 들려 오는 기상 나팔과 북소리에 홀린 듯이 귀를 기울이지만 모두가 허사로다. 나는 내가 강을, 요단강을 건널 때, 군을, 군만을, 오직 군만을 생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군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바이다.”

맥아더는 그가 총독으로 있었던 필리핀과 적국이었던 일본국민들로부터도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인천상륙작전 55년만에 한국에서 자신의 동상마저 헐릴 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신의를 중시하는 한국에서 말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의입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것은 배신입니다. 우리는 배덕자가 돼서는 안 됩니다.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면 동상을 부수는 일에 앞서 여론을 수렴하고 토론을 통해 공과 과를 따지는 것이 온당하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는 것이 그의 공이 아니라고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합니다. 나는 그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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