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으로 얼룩진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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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으로 얼룩진 과거
  • 임병무 고문
  • 승인 2005.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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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잘있거라 다시 보마 고향 산천/ 과거보러 한양천리 떠나가는 나그네/ 내 낭군 알성급제 천번만번 빌고 빌어/ 청노새 안장위에 실어주던 아~ 엽전 열닷냥” 한복남의 노래 ‘엽전 열닷냥’의 노랫말이다. 과거 길을 배웅하는 여심이 절절하다. 조선조 5백년간 과거는 인재의 등용문인 동시 통치의 기반이 되었다. 개인으로 보면 입신양명의 길이요, 출세가도다.

과거에 낙방하면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다. 다음 식년시(式年試)를 기다리려면 3년이 걸렸다. 급제하면 어사화를 달고 유가(遊街)를 하며 한껏 뽐냈으나 낙방신세면 고향에 돌아가기조차 민망했다. 충청도에는 낙방한 남도 선비가 귀향길에서 망설이다 더러 머물러 살기도 했다.

과거는 크게 소과(小科 )와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 네 가지로 나뉜다.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된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지방의 유지로 행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분상승과 더불어 그 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소과에 합격하면 백패(白牌)가, 문과에 합격하면 과거보(科擧寶)라는 옥새가 찍힌 홍패(紅牌)가 주어졌다. 일종의 합격증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문벌이 은근히 작용하였고 장원급제는 서울거주 명문가 자제들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모순도 발생하였다.

1550년(문종즉위년) 10월, 식년문과전시(式年文科殿試)에서 생원 김의정(金義精)이 장원으로 뽑혔으나 그의 가문이 한미하다 하여 명문출신이 권람(權擥)으로 장원이 교체되기까지 하였다.(청주백제유물관, 과거 출세와 양명)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과거의 비리와 부정은 더욱 횡행하였다. 수종(隨從)이라 함은 권세가의 자제들이 시험지를 베끼는 사람, 서책을 가진 사람을 데리고 과장에 들어가는 행위이며 조정(早呈 )은 채점관이 모든 답안지를 읽지 못하고 앞부분만 읽거나 먼저 제출한 답안을 보게 되자 수험생이 시험지를 앞 다투어 내는 행위를 말한다.

시험장 안에 책을 가지고 가서 보는 행위를 협서(挾書)라 했으며 다른 사람이 답안을 작성하는 행위를 차술(借述)이라 하였다. 혁제(赫蹄)는 시험관과 수험생이 서로 짜고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거나 답안에 표시하는 행위인데 오늘날 같은 문제를 중복 출제하거나 성적 대필, 쉬운 문제출제 등으로 인한 내신 부풀리기는 여기에 해당한다.

역서용간(易書用奸)은 수험생의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기 위하여 붉은 글씨로 옮겨 적을시 슬쩍 답안지를 고치는 행위이다. 관리를 매수하여 합격 답안지에 버젓이 자기의 이름이 붙은 피봉(皮封)을 붙이는 행위를 절과(竊科)라 하였다.

술래잡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채점부정을 방지키 위해 응시생의 이름을 가렸다. 답안지 오른쪽 끝에 사조(四祖)의 관향, 관직, 성명, 연령, 거주지 등을 밝히고 이 부분을 접어 상하로 몇 군데 잘라 근봉(謹封)이라고 봉했다. 응시자의 신분을 알지 못하기 위함이다.

시험 당일날은 녹명책을 보고 호명하며 과장에 들여보낸다. 이때 수협관(搜挾官)은 문밖에서 응시자들의 옷가지와 소지품을 뒤진다. 만약 책을 가지고 들어가다 발각되면 금란관(禁亂官)에게 넘겨진다.

수능이 가까워지자 일선학교에서 내신조작 행위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입신양명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좋으나 그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면 모두가 공염불이다. 예나 지금이나 입시부정은 근절되지 않으니 인생사의 근본 해법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언론인· 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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