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탁(許 拓)은 갔지만…‘허탕 신화(神話)’는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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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탁(許 拓)은 갔지만…‘허탕 신화(神話)’는 남는다
  • 충청리뷰
  • 승인 2002.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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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이젠 기억에서도 멀어진 허탁(許拓) 전의원이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17일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음성의 학교법인 삼우재단(생극중학교) 학교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고, 예순여섯의 세월은 이학교 뒷산에 묻혔다. 국회의원을 지낸 인사들의 부음소식은 으레 신문지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마련이지만 다음날 그의 부음을 알리는 기사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그의 조용한 별리(別離)는 많은 사람들에게 한가지 잊지못할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른바 90년의 대반란이다.
90년 4월 3일, 음성과 진천에선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고 이 선거에서 야당후보였던 허탁 전의원(이하 허탁)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당선된다. 이날 보선은 13대 국회의원이던 김완태씨(민정당)가 갑자기 병사함에 따라 치러졌다. 88년 4월 26일 치러진 13대 총선 때도 허탁은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세명의 후보중 꼴찌득표를 기록했다.

여 야가 사활을 건 보궐선거

90년 음성-진천의 보궐선거는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였다. 세달전인 그해 1월 22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민정(노태우) 민주(김영삼) 공화(김종필)의 3당합당에 대한 첫번째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자당은 당시 민태구라는 거물을 내세웠고, YS 상도동계의 대거 이탈로 기로에 섰던 꼬마 민주당은 고심 끝에 허탁을 후보로 결정했다. 그러나 둘간의 대결구도는 처음엔 시쳇말로 게임도 안됐다. 바로 한달전까지 충북도지사(88.5~90.3, 23대)를 지낸 민태구씨(이하 민태구)와 소금장수 허탁의 싸움이었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염전 사업을 가업으로 이었던 허탁은 84년 대한염업조합이사장을 맡기도 했으며 78년 민주통일당 중앙상무위원으로 정치와 인연을 맺었지만 90년 보궐선거 때까지도 그의 정치적 이미지는 그에게 붙은 별명처럼 ‘허탕’ 수준이었다. 때문에 보궐선거전 내내 도내의 모든 정보기관에서 올리는 보고서 내용도 ‘무조건 민태구 당선’이었다. 당시 여론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맞대결로 치러진 선거결과는 허탁 3만7441표, 민태구 3만1178표로 나타나 세상을 경악시켰다. 이를 두고 3당야합에 대한 심판이니, 유권자의 쿠데타니 하는 말들이 순식간에 퍼져갔고 결국은 ‘허탕 신화’라는 어휘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이 허탕신화가 만들어진 배경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연들이 있다.

노무현 김정길,
충청일보 노조 찾아

선거전이 본격 시작될 시점인 어느날, 당시 노무현 김정길의원이 불쑥 충청일보 노조사무실을 방문했다. 이들은 3당합당을 ‘야합’으로 매도하며 YS와의 동행을 거부한 꼬마 민주당(당시 이렇게 불렸다)의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이들 두 의원이 충청일보 노조를 찾은 것은 허탁에 대한 지역여론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 때만해도 충청일보 노조는 편집국장을 기자들의 직선으로 뽑을 정도로 선명성을 유지해 대외적 신뢰도가 아주 높았다. 노조 관계자로부터 “허탁의 지명도가 낮다”는 식의 부정적인 말만 듣던 두 의원은 대화 말미에 “허탁이 그렇게 인기가 없다면 정치적으로 큰 하자가 있느냐”고 채근해 물었다. 이에 노조 관계자는 “특별히 잘 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문제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지역여론은 허탁은 결국 허탕이라는 쪽이 대세다”며 쓴소리로 답했다. 이 말은 듣던 노무현은 갑자기 무릎을 탁 치더니 “그럼 됐다”는 말을 남긴후 총총히 노조 사무실을 나선다.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한 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탁 가지고는 어렵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이해한 줄 알았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민주당이 허탁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게 아마 이 때쯤으로 기억된다. 지명,지지도가 크게 높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 큰 하자가 없었다는 말에 후보결정의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기발한 발상이었다”고 말했다.

농부가 더 잘 어울린 사람

허탁이 결정적으로 여론을 타기 시작한 계기는 소위 박찬종의원 폭행사건이었다. 허탁을 돕기 위해 지지자들과 음성면 감곡면을 돌던 민주당 박찬종 일행은 이곳에서 상대 후보 지지자들을 만나 서로 몸싸움을 벌이던중 넘어져 이마 등에 상처를 입고 당시 음성 순천향병원(현 음성성모병원)에 입원한다. 이를 두고 여 야간에 “자작극이다” “정치적 테러다” 공방이 일었고 민주당은 이 사건을 십분 활용, 여론을 주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같은 허탕 신화도 2년후에 열린 14대 총선에서 막을 내린다. 허탁은 민태구(민자)와 정우택(통일국민)에 이어 3위 득표에 그쳐 재선에 실패했다. 그후 정계를 은퇴한 그는 음성군 생극면 신양리의 생가에 주로 머물며 학교일과 농사일에만 몰두했는데 이 집은 지금도 아궁이에 장작을 때고 있다. 그만큼 검소하게 살았다. 주변 사람들은 “꼭 촌사람같은 수수한 외모 때문에 국회의원보다는 농부가 더 어울렸다”고 말한다. 이것도 일종의 정치무상(?)일 것이다.
/ 한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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