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환의 심층해부‘빨갱이 사냥’ 벌였던 야당 거물 조병옥도 ‘용공분자’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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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의 심층해부‘빨갱이 사냥’ 벌였던 야당 거물 조병옥도 ‘용공분자’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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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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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반공포로 석방은 부당” 조병옥 담화 발표와 격노한 이승만

조병옥. 호랑이 같은 얼굴 모습, 즉 호상(虎象)으로 유명했던 그는 전형적인 ‘반공 정치인’이다. 아울러 그는 보수 야당의 계보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정치 거물이기도 했다. 김대중, 김영삼씨가 1970∼80년대 보수 야당을 이끌었다면,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1940∼50년대 보수 야당의 선두에는 신익희와 더불어 조병옥이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 조병옥마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반병신(?)이 됐던 비사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고질병 색깔론이 기승을 부렸던 자유당 시절로 달려가 보자.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1894∼1960).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숭실학교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해 귀국한 그는 연희전문 전임강사가 됐으나 좌익 성향의 교수와 대립하여 사직했다. 그것이 그의 반공의식을 더욱 강화한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조병옥은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는 한편 미군정청 경무부장에 취임하여 ‘빨갱이 사냥’에 주력했다. 대구 10월항쟁, 제주 4·3항쟁 등 미군정청과 친일경찰에 맞섰던 당시 민중들의 봉기를 ‘좌익폭동’으로 규정하고 국가폭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탄압했던 장본인 중의 한 명이 바로 조병옥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해방정국의 분수령이었던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 결정에 반탁운동으로 맞선 우익진영의 선두에 섰으며, 1948년에는 남한단독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장면, 김활란씨 등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이자 한국대표로 임명되어 유엔에 파견됐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내무장관으로 대구사수를 진두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북한이나 좌익의 입장에서 보면 ‘남조선 반동분자’의 수괴 중 한 명임에 분명했던 조병옥. 그러나 그런 그가 한때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사건이 있었다. ‘반공투사’마저 ‘용공분자’로 둔갑시켰던 이 희대의 사건 전말은 다음과 같다.

북한포로 석방을 비판한 조병옥

조병옥은 한국전쟁 와중에 발생한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승만과 충돌하며 내무장관을 사임한 뒤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에 취임하는 한편 월간 <자유세계>를 발간하던 중 1952년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이승만에 맞섰다. 이를 계기로 조병옥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이 급속히 악화됐음은 물론이다. 그런 상황에서 터진 것이 바로 이승만의 북한군 포로 석방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정전협정 조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북한군 포로 2만7000여 명을 석방했다. 그런데 당시 유엔에서는 정전협정이 한창 논의되고 있을 때였고, 포로 문제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실제로 제네바 협정 118조에는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 송환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독일군과 일본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고 소련의 전후 복구사업에 강제 동원했던 악몽의 재발을 막기 위해 서방 쪽이 강력히 요구해 확립한 원칙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바로 그 원칙을 깨버린 것이었다. 당연히 국제사회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당시의 상황은 남한에 매우 좋지 않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7월 18일자 <한겨레21>에 기고한 ‘정전협정의 저주받은 유산’이란 글에서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 바 있다.
“이(북한 포로 석방―필자주)에 격노한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고 규탄했고, 이때가 8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유일한 때였다는 아이젠하워는 친구 대신 또 하나의 적을 얻었다고 탄식했다. 다행히 공산군 쪽은 이 문제로 판을 깨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정전협정은 체결되었다. 이런 무모함을 보이는 이승만을 내쫓기에는 너무 늦었고, 실제로 단독 북진도 불사할 무모한 인물인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국무성 차관보인 로버트슨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로버트슨은 무려 19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이승만을 설득했다. 그는 이승만을 ‘교활하고 임기응변의 재주가 있는 장사꾼적 기질에 더하여, 그의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에 충분히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고도로 감정적이고 비합리적, 비논리적인 광신도’라고 규탄―그 표현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가해지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했지만, ‘아시아에서 최대이며 가장 강력한 반공군대’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미국통이었던 조병옥은 바로 이러한 국제적 정세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포로 석방 사흘 후인 6월 21일 개인적 담화를 발표했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정부가 유엔과 미국과의 하등의 사전협의 없이 또는 양해도 받지 않고 엄연히 제네바 포로협정에 규정되어 있는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유엔과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부당한 처사이므로 본인은 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단기 4286년 6월 21일 조병옥.”

“조병옥, 이런 괘씸한 놈을 봤나”

조병옥은 담화를 발표한 뒤 이승만을 직접 만나려고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긴 했지만, 악화될 대로 악화된 외교 문제를 수습하기 위한 방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조병옥은 유엔에 한국대표로 파견됐던 자신의 경력을 봐서라도 이승만이 자신을 만나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병옥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결단(?)에 반기를 들고 담화까지 발표한 조병옥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이런 괘씸한 놈을 봤나. 감히 나에게 반기를 들어. 내가 어쩌다가 그런 놈을 장관까지 시켜줬지?”
‘국부(國父)’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것일까. 해방 이후부터 이승만의 충직한 하수인 역할을 도맡아 왔던 극우테러단이 제일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조병옥이 묵고 있던 숙사 주변과 종로경찰서 근처에 “역적 조병옥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벽보가 나붙었다. 6월 24일 거리에 나갔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확인한 조병옥은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1959년 조병옥이 집필한 <나의 회고록>(1986년 도서출판 해동에서 <조병옥 나의 회고록>으로 재발간)을 통해 그날의 정황을 살펴보자.
“과연 그날 밤 12시경 해서 수 명의 청년이 담을 넘어 돌입한 후 고요한 밤중에 소음을 내고 방으로 들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 찰나에 김우평씨는 안방으로 피신하고, 8명의 괴한들은 방문을 차고 당시 전등불도 없이 촛불 한 개를 켜놓고 3간 사랑방에 홀로 앉아있는 나를 겨누고 돌입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무슨 용무가 있으면 낮에 만나 이야기 할 것이지, 이 야밤중에 담을 넘어 침입하여 구두를 신은 채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다’라고 힐책하는 찰나에 무슨 흉기를 가진 한 괴한이 나의 두부(頭部)를 강타하여 나는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다. 약 한 시간만에 의식이 들어 깨어나 보니 외과의사가 내 상처를 응급치료하고 있었고 집주인과 김우평씨도 방 안에 앉아 있었으며,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은 유혈이 낭자하였다.”
조병옥은 나중에야 괴한이 휘두른 흉기가 쇠뭉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조병옥의 돈암동 자택도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풍비박산이 되었다.
야당 중진 의원에게 가해진 테러와 파괴. 그러나 그것은 ‘조병옥 빨갱이 만들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실제로 자유당 정권은 조병옥을 붉은 포승줄로 꽁꽁 엮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 경무대로 찾아가 이승만에게 조병옥 체포를 건의한 것이다. 시인이자 프리랜서인 이경남은 <신동아> 1982년 12월호에 게재한 ‘실록 정치장군 원용덕’이란 글에서 그 날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원용덕(헌병총사령관)은 6월 25일 아침 경무대에 들어가 조병옥 체포를 건의했다. ‘그 자는 이번에 8군사령관을 움직여 우리 정부에 압력을 넣으려는 계략인 것 같습니다. 한시라도 방치해둘 수 없습니다. 각하, 그 자가 공연한 것을 더 저지르도록 방치하지 마시고 아주 잡아 가두어야 하겠습니다.’ 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용덕은 곧 사령부로 돌아와 조병옥 체포를 명령했다.”

다른 곳 놔두고 머리만 난타했다

원용덕의 부하들은 곧바로 수원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수원으로 달려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6월 25일. 대대적인 반공데모가 열리는 ‘6·25동란 3주년 기념일’이었다.
이승만과 원용덕에겐 ‘금상첨화(錦上添花)’였겠지만 조병옥에겐 ‘설상가상(雪上加霜)’이 아닐 수 없었다. 혹여 그 행사에 참가한 폭도들이 군중을 선동하여 또다시 습격해올 것을 염려한 조병옥이 김우평과 함께 서둘러 서울을 빠져 나와 수원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다시 <나의 회고록>을 통해 체포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자.
“그날 오후 4시경 헌병장교 한 사람이 7, 8명의 헌병을 대동하고 수원의 내 숙소를 찾아와서 나와 김우평 씨를 체포하여, 헌병총사령부에 유치한 후, 그날 저녁 서대문 육군형무소에다 감금하였다. 육군형무소에 유치되어 있는 동안 나의 분노 나의 정신적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에 내가 감옥생활을 약 5년 동안이나 하였지만 그때에는 각오하였던 고생인지라 정신상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외교관계를 걱정한 나머지 그리고 해방 이후 반공투쟁과 대한민국 방위에 심혈을 경주한 내가, 대한민국 자유당 정부의 권력의 제물이 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왕년의 반공투사’ 조병옥에게 덧씌워진 죄목은 ‘국가변란죄’였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지만, ‘빨갱이 만들기’에 혈안이 된 헌병총사령부에겐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때 참 그이는 많이 다쳤어요. 다른 데는 가만 놔두고 꼭 머리만 때렸어요. 그리고는 뭐라 했느냐 하면 총살시켰다는 거예요”라는 조병옥의 아내 노정면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조병옥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헌병총사령부는 연행 사실을 공식적으로 한 마디도 발표하지 않은 채 조병옥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갔다.
그들의 음모가 무엇이었는가는 조병옥이 <나의 회고록>에서 했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육군형무소 재감중 가장 기괴한 일은 조봉암과 관련시켜 대통령 암살사건을 음모하였다는 피의된 점을 기이하게도 검사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르매 필경 나는 법정에 한번 서리라고 생각하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경남은 ‘실록 정치군인 원용덕’에서 당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뚱딴지같은 ‘조봉암과의 관련’은 무엇이며 ‘대통령 암살 음모’는 또 무엇인가. 이 무렵 원용덕은 국회부의장 조봉암을 때려잡기 위해서 제2대 대통령 선거전 때 조봉암 후보의 선거사무차장을 지낸 김성주를 먼저 체포하고는 허구의 조작극을 꾸며가고 있었다. 이 조작극 속에 조병옥의 이름도 끼어 넣었으며 이 대통령에게 조사가 엄중 진행중이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조병옥은 수감된 지 27일만에 살아났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곽상훈 의원에 의해 육군형무소 감방에서 발견된 것이다.

색깔론의 신기와 저주의 위력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테러와 투옥의 후유증은 초로의 정치인에게 너무나 컸었던 모양이다.
이 사건 직후 조병옥은 “말초신경이 고장이 나서 글씨를 쓸 수가 없고, 보행도 장해가 있고, 기억력도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그는 투표일을 정확히 한달 앞둔 2월 15일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반공투사’마저 ‘용공분자’로 둔갑시킬 수 있는 색깔론의 놀라운 신기(神技)와 그 저주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원용덕은 누구인가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암투 벌인 ‘정치군인’

원용덕(元容德, 1908∼1968)은 전형적인 ‘정치군인’이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조병옥이 잠시 연희전문에서 전임강사를 지냈으니, 두 사람은 사제지간인 셈이다. 1931년 강원도 강릉에서 병원을 개업했다가 이듬해 만주군 군의장교로 입대했다. 해방 당시 그의 직급은 만주군 중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일행적’과 ‘정치군인’의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박정희와 빼 닮았다.
해방 후 남한 군부를 일본 육사와 만주군 출신들이 장악하면서 원용덕도 발빠르게 창군의 주역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1945년 12월 이응준과 함께 미군정에 의해 설립된 군사영어학교 개교의 대부(代父)가 됐으며, 다음해 1월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후 경비사관학교 교장, 여단장을 거쳐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북지구 편성관구 사령관으로 활동하다가 퇴역하였다.
원용덕은 1952년 4월 국방장관 특별보좌관으로 현역에 복귀했다가 한달 후 이승만에 의해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됐다. 바로 이때부터 그는 ‘정치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강제 연행한 ‘부산 정치파동’을 주도함으로써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된다. 이승만의 총애를 배경으로 1953년 3월 중장으로 승진하면서 헌병총사령관이라는 무소불위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원용덕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기 위해 특무대장 김창룡과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벌인다.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조병옥 국가변란죄 체포 사건, 서북청년단 리더 김성주 불법 총살 사건, 야당의원 불온문서 투입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김성주 불법 총살 사건은 다음호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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