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전파된 곳 <김태하>

신대교회는 충북에서 가장먼저 기독교가 들어온 것으로 유명하다.이 신대교회는 청주에서 무심천 제방을 따라 내려가다가  미호천 제방을 만나 더 내려가면 '윗신대(上新垈里)'가 있고, 거기서 더 내려가면 '아랫신대(下新垈里)'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또 청주 기차역에서 옥산 쪽으로 가다 미호천 제방에서 우회전하여 올라가도 된다.

▲ 미호천변 신대리에 있는 신대리교회 전경 신대리는 1983년 청주시에 편입되기는 했어도 전형적인 시골 농촌이다. 신대(新垈)라는 마을 이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장마 때마다 홍수에 밀려온 토사가 쌓인 곳에 생긴 마을이다. 주변의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며 1921년 제방이 만들어진 다음부터 마을은 수해 피해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하천 가의 넓은 둔치에는 채소재배를 해서 청주에 공급하여 많은 수입을 얻기도 하는 곳이다.여기에 있는 교회는 그 유명한 내력 때문에 규모도 퍽 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찾아가 보면 이 교회가 과연 그 유명한 신대교회인가 의심을 하게 된다.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규모여서 그런가 보다.마을 입구의 노인정을 지나 교회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길 중간쯤에 손님 마중 나온 듯 비석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85년 2월 4일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사업회 충청북도협의회(회장 : 엄기현 목사)가 세운 기독교전래기념비다. 청주지역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초교파적으로 참여하였고, 충청북도에서 지원하여 건립한 것인데, 이 비석에 1901년 신대리 교인들이 충북에서 최초로 이곳에 교회를 세운 내력과 이곳에서 충북 전역에 복음이 전파된 내력이 새겨져 있다.이 기념비는 원래 신대교회 마당에 세우려다 워낙 교회 터가 좁아서 마을 노인들의 협조를 얻어 이 곳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 비석의 신대교회 내력은 다음과 같다.그 옛날 이곳에 기독교를 들여온 사람은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이며 이들은 이곳에서 농업을 하고, 농한기에는 서울로 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당시에는 이곳 신대 마을 앞 나루에서 배를 타고 미호천을 건너 진천, 죽산을 거쳐서 다녔다는 것이다.어느 해인가 오천보는 신대 마을의 문성심과 죽산에 들렀을 때 마침 그 곳에 있는 '둠벙리교회'에서 사경회(교인들이 일정 기간 성경 공부를 하는 모임)를 하였다는 것이며, 이 사경회에 두 분이 참석하였다가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둠벙리 교회는 1900년경 창립하여 음력 정월 농한기에 보름 동안 사경회를 하였었다는 기록이 1902년 2월 20일 '그리스도신문'에 기록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은혜를 입고 돌아와서 당숙인 오삼근과 상의하여 교회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처음에는 오천보의 집(현재 오영석 장로가 살고 있는 집)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누군가가 좁은 이곳에서 모임을 갖기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주막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하여 그 때부터 주막에서 광목에 십자가를 그려 걸고 집회를 하였다. 이것이 소문나자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가지고 모였으며 그러자 주막 주인은 술손님이 모이는 것으로 알고 반겼다고 한다. 후에 서울에서 온 밀러 선교사(목사)가 고마운 표현으로 미소하며 주인의 등을 두드리니까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설교를 하면서 "술을 먹으면 집안 망하고 죽어서 지옥 간다"라고 하자 주인이 화가 나서 빗자루를 휘두르며 쫓아냈다는 것이다..그래서 최초의 주막교회는 문을 닫고, 다시 오천보의 집으로 옮겼으며, 오래지 않아 오천보의 집 앞에 초가삼간 교회를 세웠고, 이 때 신도는 16명이라는 사실이 1902년 북장로회 선교사연례회에 보고되어 그리스도신문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밀러 선교사는 윤홍채(尹鴻彩)라는 조사를 이곳에 보내어 신자를 돌보며 전도하게 해서 청주뿐만 아니라 보은, 회인, 괴산 그리고 경상도 상주까지 교회 설립하는 일을 지도하였다는 것이다.신대교회에는 또 다른 전설적인 전도부인이 있으니 그는 오영석 장로의 큰어머니 이춘성(李春成)이다. 이춘성은 선교사의 주선으로 평양에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와서 충청도 전역으로 다니며 전도를 하였는데 특히 귀신 내쫓는 것을 잘 했다고 한다. 키는 작았지만 매우 당찼으며, 불꽃 튀는 눈초리로 호령을 하면 귀신이 모두 도망쳤다는 것이다. ▲ 기독교전래기념비
신도에게는 매우 자상하였던 그였기에 신대교회 좁은 마당에는 '이춘성 전도부인 공덕비'와 해방 직후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를 지킨 '오을석(吳乙錫) 장로 추념비'가 나란히 서있다.

1970년 붉은 벽돌로 특색도 없이 지은 이 교회에 이 두 비석이 있어서 이 곳이 청주지방 복음선교1번지였고, 마을에 개화 바람을 일으킨 청서학교(淸西學校)가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옛날 광목에 십자가 그려 걸고 예배하던 주막집의 위치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미호천 풀밭 어느 곳인가 살피다보면 일제 때 홍수 때문에 이 곳에 살 수 없다고 미호천을 건너가 살던 사람이 세웠다는 '국사교회'가 보인다.

그 때 홍수 때문에 오천보와 함께 신대교회를 세운 문성심, 오삼근도 이 때 이 고장을 떠나서 현재 오영석 장로가 절손된 큰아버지 오천보의 집을 물려받아 대를 이어 고향 교회를 지키고 있다. <김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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