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동막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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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동막골
  • 임병무 고문
  • 승인 2005.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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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동막골’ 지명을 가진 동네는 수 없이 많다. 아마 군(郡)마다 한 두 개 쯤 동막골이 있을 것이다. 청주시만 해도 동막골 지명을 가진 곳이 여러 곳이다. 청주시 월오동 선도산 자락에 동막골이 있고 이정골 저수지 밑에도 있다. 청주 서쪽 지역인 신전동에도 동막골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막골은 감자 심고 수수 심는 깡 촌을 뜻한다. 하늘만 빼꼼하게 보이는 산골 마을이다. 산자락에 매달린 산다랑이 논이나 따비 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동막골은 문명의 혜택서 철저히 소외된 지역이다.

동막은 동쪽의 막힌 곳으로 동쪽 골짜기에 있는 벽촌을 뜻하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막아 저수하던 동막이가 있던 골짜기’ ‘마을 입구나 요지에 동막(洞幕)을 두었던 골짜기’ ‘동쪽 막’ 등이라는 유래설이 전한다.(청주지명유래, 청주시)

전설에 따르면 스님들이 남석교(南石橋)를 놓기 위해 이곳에 막(幕)을 치고 돌을 다듬었다 해서 동막(東幕)이라고 한다. 남석교의 석질을 조사한 결과 원석을 월오동 동막에서 가져온 것으로 관련학계는 보고 있어 단순한 전설만은 아닌 듯 싶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원년(五鳳元年) 즉, 박혁거세 즉위원년인 BC 5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주 남석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돌다리이자 규모도 가장 큰 최장의 돌다리다. 청주대 건축학부 김태영 교수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길이 80.85m, 너비 3.7m로 한양대 앞의 살곶이 다리보다 더 길다.

남석교는 상판을 받치는 T자형의 기둥의 세 개씩 놓고 그 위에 세 줄로 청판 돌을 다듬어 놓은 돌다리다. 그 원석을 어디서 가져왔느냐에 대한 해답은 대개 동막골에서 구하고 있다. 동막골의 체취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 2천년의 돌다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땔감이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기 전까지 무심천 변에는 나무전이 형성되었다. 장작바리에서 솔잎을 단으로 묶은 ‘개비’나 ‘삭정이’ 등이 지게에서 낮잠을 자며 살 사람을 기다렸다. 일부 깍쟁이 나무꾼들은 겉과 속이 다른 나뭇짐을 부려놓았다. 겉은 실팍하지만 속은 보잘 것 없는 부스러기로 채우기 일쑤였다.

월오동 동막골은 청주 제1봉인 선도산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땔감이 지천이었다. 동막골 나무꾼들은 소미재를 넘어 청주장으로 왔다. 소미재는 동막골 나무꾼들이 쉴참이었다. 나무를 사러 나온 사람들은 동막골 나뭇짐을 최고로 쳤다. 여느 나뭇짐과 달리 겉과 속이 옹골찼다. 야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 인심 속에서도 동막골 나무꾼들은 속임수를 쓰지 않고 실팍한 나뭇짐을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월오동 동막골에서 말구리재를 넘으면 한계리 저수지에 이르고 여기서 한계리 저수지 산기슭을 지나면 낭성면 안건이 마을에 도달한다. 낭성에는 나무가 많아 벌목작업이 성행하였다. 벌목작업을 할 때 목도질을 하며 부르던 노래가 있는데 그게 ‘낭성 산판소리’다. 동막골에서는 나무꾼의 애닯은 초부가가 선도산자락에 울려 퍼지고 낭성에선 산판소리의 가락이 고된 일손을 달래주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수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6,25 당시 강원도 함백산 절벽에 자리잡은 동막골에 연합군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벌어지는 연합군~국군~인민군~주민 사이의 해프닝을 긴박하고 밀도 있게 그려냈다. 지금은 웰빙 붐을 타고 동막골에도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있지만 말이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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