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서북지방인 섬서성의 성도로 중국 10대 도시인 서안 비행장에서 서안(옛 장안) 시내로 들어오다 보면 더덕과 고사리를 재배하는 황토고원과 너른 옥수수 밭 그리고 지하수 관정을 개발해 놓은 조그만 창고집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버스를 탄지 40분 황하지류인 서안의 젖줄 위하(옛 위수)가 유유히 지나간다. 섬서성은 황하중류지구로 중국고대문명의 발상지다. 특히 서안과 그 부근 지역은 주나라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에 걸쳐 13개 왕조가 도읍으로 정했던 곳이다. 과거 이 땅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의 당당한 모습은 화려했던 궁전들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능묘들만이 그 옛날의 흔적을 어렴풋이 남기고 있다. 서안 주변에는 진시황릉을 비롯하여 전한의 11개 능과 당대의 18개 능을 포함하여 70여개의 제왕능묘들이 흩어져 있다.
20C 최대의 고고발굴로 꼽히는 진시황릉 병마용갱은 진시황릉 능원의 일부인 지하갱이다. 1974년 3월 서안 부근 서양촌 농민이 우물을 파다 발견한 병마용 파편이 단서가 되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이래 1977년 10월까지 1·2·3호갱에서 병사와 말의 도기인형 8,000개와 수백점의 청동기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마무리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병마용갱박물관 안에서 발굴모습까지 생생하게 관람할 수 있다. 지하에 묻힌 이 병마용들이 호위하고 있던 진시황의 무덤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병마용갱 서쪽 1.5㎞ 지점에 있는 진시황릉은 원래 봉분높이가 120여미터였으나 지금은 70여미터로 계단을 통해 능 정상에 올라 보면 능이 온통 석류나무로 덮여 있다. 진시황이 13세에 왕이 된 후 능 건축에 착수하여 동원한 최대인원은 70만명, 걸린 기간은 37년이었다. 최근 미국의 내셔널지오그래픽 TV가 로봇에 고감도 렌즈를 부착시켜 왕비의 방을 보여주기로 한 이집트의 쿠푸대피라밋 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2만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대역사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고대 은·주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거나 그냥 땅을 파서 묻는 묘혈방식으로 소박하게 장사를 치뤘다. 자연에서 나온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인공적인 장식이나 절차가 별 소용이 없었다. ]봉분을 만든 최초의 사람은 공자로 알려져 있다. 춘추 말 부친상을 당했을 때 공자는 1m 정도의 봉분을 만들고 그 주변에 나무를 몇 그루 심었다.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였던지라 고향에 돌아왔을 때 부모 묘소를 찾기 쉽게 하려던 의도였다.
그러나 진시황릉은 봉분과 나무 심는 방식이 공자를 따르되 능의 규모와 내부시설, 부장품 등은 공자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해충들이 시신을 훼손치 못하도록 한다는 명목으로 봉분 위에도 소나무를 심었다. 황제능에는 소나무, 왕능에는 측백(柏), 제후능에는 약초를 심도록 했다. 오늘날 진시황릉에 심겨진 석류나무는 오래전 불타버린 소나무 대신 1960년대 초에 농민 소득 증대를 위해 심은 것이다. 거대한 진시황릉의 발굴은 또 한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유물의 발굴·보존처리 기술수준이나 막대한 소요경비를 감안하여 발굴을 미루고 있는 형편이다.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여 만리장성을 쌓고 제도통일을 이룬 진시황은 죽음에 대한 정복까지 시도하여 서복을 동해에 보내 불로장생약을 구해 오도록 하기도 했다. 자신의 죽음은 물론 권력계승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그가 진나라가 장기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시황제가 5차 순행 중 병을 얻어 하북성 평태(平台)에서 사망하자 그의 측근들은 유조를 위조하여 태자 부소와 몽념장군을 자결하게 하고 우둔한 막내아들 호해를 옹립했다. 그러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제위에 오른 호해는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여 진 멸망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으니, 진나라가 불과 15년만에 망한 것은 시황제의 폭정보다 적절한 권력계승장치를 마련치 않았던 그의 오만함에 연유한 면이 크다 할 수 있다.

한무제와 무릉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한무제(BC159∼87) 능묘인 무릉은 큰 대로에서 요철이 심한 비포장농로를 꺽어들어 25분 가량 달린 곳에 자리잡고 있다. 16세에 즉위하여 이듬해 중국 최초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썼던 무제는 50년간 매년 조세 수입의 ⅓ 가량을 써가며 수릉(壽陵)을 축조하였다. 생전에 마련해두는 사자의 옷을 수의라 하듯이 수릉은 생전에 미리 세워 놓는 능이다. 수의를 마련해 놓으면 장수한다는 속설처럼 수릉을 구축해 놓으면 장수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50m에 육박하는 4각뿔형의 무릉은 군데군데 나무가 심겨 있다. 한나라 때의 제릉은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부장품을 후하게 넣는 풍습이 주류를 이뤘다. 이는 한대의 경제력과 함께 죽은 사람도 세계는 다르지만 꼭같이 생활을 한다는 믿음 때문에 지상에서 누리던 것 뿐 아니라 사후에 누리기를 바라는 것까지 그림이나 모형, 실물로 함께 매장했기 때문이다. 한대 최대 규모의 본인의 능을 축조하고 흉노와 40여차의 전쟁을 치뤄 서역의 교통로를 확보한 무제가 제위에 오른지 50년만인 60대 중반 병이 들었다. 권력 주변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한 무제에게 측근 강충(江充)이 무고하기를 태자가 무제를 저주하였다고 하였다. 궁지에 몰린 태자는 병사를 일으켰지만 결국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다. 나중에야 강충의 무고임을 깨달은 무제는 강충 집안을 족멸하고 죽은 자식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사자궁(思子宮)을 지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장탄식은 죽을 날이 다가올수록 깊어지기만 했다. 55년간이나 재위하였던 무제 곁에서 늙어버린 태자가 어떤 존재였던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건릉
무릉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야산을 이용해서 만든 세계 최대의 합장묘 건릉이 있다. 당의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은 당 초기의 힘든 경제사정과 검약풍토 조성을 위해 자신의 능인 소릉(昭陵)부터 힘들게 봉분을 쌓지 말고 야산을 이용해서 묘실을 만들고 부장품을 최소화하는 원칙을 세웠다.
당고종 이치는 서예에는 능했으나 심성이 유약하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면서도 태자시절 궁전에서 보았던 아버지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武)씨의 미모와 총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친이 사망한 후 감업사에서 비구니로 있던 무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다시 불러들이니 그 여인이 바로 황후자리도 성에 차지 않아 주(周)라는 새 왕조를 창건하여 중국사상 최초의 여자황제 자리에 오른 신성(神聖)황제이다. 당고종의 손자인 현종이 아들의 후궁인 양귀비를 가로채 잠시 도가사원에 보냈다가 자신의 후궁으로 맞아들여 파탄을 자초한 형국은 어쩌면 그리도 할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지 쓴 웃음만 나온다. 문화대혁명(1966-76)때 모택동의 처 강청이 측천무후를 흠모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녀가 현대판 측천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대 중국의 황제능 작명법
고대 중국의 황제능묘 명칭은 대체로 세 가지 방법으로 지어졌다. 첫째는 정식명칭이 지어지지 않아서 후대인들이 편의상 붙인 것으로 황제(黃帝)능이나 진시황릉이 그런 예이다. 둘째는 능묘 소재지의 지명에 따른 것이다. 무제의 능묘이름이 무릉(茂陵)인 것은 그 지역의 지명이 무향(茂鄕)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예부에서 정한 황제의 존호와 시호에 근거해 작명한 경우다. 고종의 존호는 천(天)황대성황제이고 묘호는 천(天)황대성대홍효황제여서 8괘에서 천을 대표하는 건(乾)을 써서 건릉이라 한 것이다. 건릉이라는 명칭이 후대에 다시 보이는 것도 이런 작명방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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