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구월이다.

무덥던 여름이 소리 없이 떠난자리, 아침 저녁 선들바람 찾아오니 이제야 살 것만 같은 그 어떤 안도감 때문에 평온한 마음이다. 사람을 빨래 짜듯 땀을 흘리게 하던 태양의 그 강렬함도 어쩌지 못했나보다 자연의 순리 앞에선.

한 여름, 푹푹 쪄대는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 에어컨을 틀어 댔지만 어디 요즘 아침 저녁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의 맛만 하던가! 상반된 모순성이 있어야만 그 진가를 느끼게 되는 것인지. 세월 따라 오묘한 자연의 이치가 새록새록 더해 감에 따라 나 역시 점점 묵은지가 되어 가야 하건만, 여전히 어리석은 모습으로 삶 속을 헤맨다. 어느 한 순간도 애쓰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반항처럼 애쓰다가 지쳐 잠시 눈을 돌리다 보니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초록의 여린 풀잎이 나의 우매함을 흔들어 깨운다.

기다림!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그저 그냥 그대로 온전히 받아 들일 줄 아는 마음이어야 하고 또 언제가 되었든 그 어떤 상황이 되었든 서두르지 않고 묵묵함으로 합당한 때를 기다려야 함이다.

병원 장례식장엔 교통사고로 또 한 사람이 이승과의 결별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사랑하던 이들에게 잘 있어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는 초점 없는 사진 한 장 끌어안고 억장이 무너지는 젊은 미망인, 너무 어이없어 울지도 못하고 저승 문 앞 까지 혼이라도 따라갈 요량인가 혼절하고 또다시 혼절하기를 수차례다.

삶! 이것이 다 무엇이던가?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늘도 애드러워 빗줄기가 하염없더니 어느새 비가 멎었다. 티없이 맑고 푸른 하늘색이 너무도 시리다. 어차피 누구든 한번은 가야 하는길이니 가슴으로 가슴으로 냉정해지라 함인가? 이미 끊어진 인연에 미련같은거 그게 다 무슨소용이냐고 핀잔처럼 내리는 하늘빛이던가! 해는 왜 그리도 밝게 빛나고 하늘은 왜 저리도 푸른가!

문득, 바람 한줌 불어왔다.

사랑하는 이, 두고가는 고인의 마지막 손길인양, 미망인의 흩어진 머리결을 어루만지는 듯 흔들고 가는 바람결에 마냥 공허하고 쓸쓸하더니 내 시린 가슴으로 빗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절기는 어느새 다가와 처서가 지나고 철없는 어린 것은 제 아비 영정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밤새 흐느끼는 제 어미와 잠 한숨 못 들었을 터. 그들을 바라보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병원 장례식장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세상과의 통로로 맑은 바람, 빛나는 햇살, 저 멀리 구름 속을 가르며 달려가는 비행기 소리들이 들려왔다. 모두 살아 있어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들이다. 안과 밖은 너무도 다른세상이다.

젊은 미망인은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뜨면서 맞지도 않은 커다란 건을 눈꺼풀까지 뒤집어쓰고 상주 복을 입은 어린 아들 손을 의지한 채, 밥 한술 국물에 말아 달라고 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가 말이 없다. 다만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만 끄덕일 뿐.

순리!

굳이 말이 없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며 또 자연의 순리라고.

어차피 살아야 할 사람은 살아가는 거라고. 살아 있으니 먹어야 하고 또 먹어야 살게 아니냐고.

서럽고 애드러워도, 억울하고 원통해도 어쩌랴!

젊은 미망인은 밥 한 술에 한숨짓고, 눈물짓고, 설움 짓고.

긴 세월에 못다 새긴 그리움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목이 메고, 삶이 멘다.

인생길! 그 길을 우리는 자신들도 모르는 기다림 속에서 순리를 따라 그저 걸어 가고 있다. 정작 그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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