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식(洪範植)이 전북 금산군수로 부임한 것은 1909년이었습니다. 명문거족 출신이면서도 평소 나라에 대한 생각이 깊었던 홍범식은 전임군수에 의해 국유로 몰수되어 빼앗긴 백성들의 땅을 찾아 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전임지인 태인에서도 2년 동안 재임하며 황무지 개간과 관개사업에 힘을 쏟았던 그는 백성들을 의병으로 몰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은밀히 의병활동을 도와 이미 선치자(善治者)로서 명성이 난 터였습니다.

홍범식은 일본이 한국을 병탄(倂呑)하려는 음모를 알아채고 남몰래 괴로워하면서 비장한 각오로 유서를 써 놓습니다. “아, 아, 내가 이미 사방 백 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홍범식은 이듬해인 1910년 8월 29일 급기야 한일합방이 발표되자 의분을 못 이기고 평소 사또가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는 객사 뒤뜰의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맵니다.

객사 안쪽 벽에는 ‘國破君己 不死何爲’(국파군기 불사하위: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어찌하리)라는 여덟 자의 유언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의 40이었습니다.

홍범식의 장례는 금산군민들의 애도 속에 성대히 치러졌습니다. 부의를 한 사람만도 5000여명에 달했고 발인 날에는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분향하고 울었습니다. 장례행렬이 그가 낳고 자란 괴산으로 향할 때는 100여명의 백성들이 300리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습니다.

홍범식의 순국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유생, 환관, 평민 등 45명이 뒤따라 목숨을 끊어 일제의 강제합병에 항거했습니다. 선비 매천 황현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족과 관리, 양반, 유생, 효자, 효부, 열녀, 과부와 노인 등 9만여 명은 합방 축하금으로 일제로부터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나라가 망한 대가로 어떤 사람들은 원수로부터 돈과 명예를 얻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의분을 못 이겨 죽음의 길을 택했으니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운명 앞에 같은 민족이 보인 당시의 모습은 그렇게 달랐습니다.(강영주·‘벽초홍명희평전’, 송건호·‘한국현대사’)

8월 29일, 오늘 우리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통한의 그날을 다시 맞이합니다. 세월을 거슬러 95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망각증 때문일까, 이제 그날을 기억하는 이조차 찾아보기 어렵고 달력에는 ‘국치일’표시마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엊그제 8.15광복절은 온통 잔치로 떠들썩했지만 정작 나라가 망한 국치일은 국민들의 뇌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것입니다.

말로는 ‘충절의 고장’을 입버릇처럼 되뇌는 자치단체장들은 낯내기 행사에 혈세를 쏟아 붇는데 정신이 없고 그 많은 사회단체들 또한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순국선열의 고귀한 정신마저 기리지 못하는 지지리 못난 후손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 인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치신 홍범식선생의 순국이 어찌 홍씨 문중만의 일이겠습니까.

제대로 된 국민들이라면 경제규모 10위, 국민소득 1만 5천불을 자랑하기 전에, 아직껏 월드컵 4강에 취해 “아, 대한민국!”을 연호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한다”는 경구가 귀를 때리는 국치일 아침입니다. 오호라, 대한민국, 아,아, 홍범식선생이시여.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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