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 비엔날레의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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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비엔날레의 맥락
  • 임병무 고문
  • 승인 2005.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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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에도 공예 비엔날레가 있었을까? 공식적인 행사는 없었어도 선인들은 생활 속에서 이를 추구하였다. 금강의 상류지역인 미호천 변에는 특히 질그릇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 질그릇 문화는 농경생활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신석기 시대 그릇의 밑면은 평평한 ‘평평 밑 토기’와 뾰죽한 ‘뾰죽 밑 토기’로 대별된다. 강원도 양양 오산리는 그러한 토기의 표본적 출토지 인데 ‘평평 밑’의 연대가 더 깊다. 세워 놓기가 극히 불안정한 ‘뾰죽 밑’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 해답은 신석기의 집터가 해안선, 또는 강가의 모래밭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닷가, 강가 모래밭에 원추형의 ‘뾰죽 밑’ 토기를 꽂아 두면 아주 안정적이다. 흔들림이 거의 없다. 팽이와 같은 ‘뾰죽 밑 토기’는 그런 필요성에 따라 탄생한 것이다. 그런 토기에 여러 가지 형태의 빗살무늬를 그려 넣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생활 용기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기 의한 미의식의 발현이다. 빗살토기는 서울 암사동 식과 부산 동삼동 식으로 대별된다. 암사동 식은 가는 빗살무늬(세선문)이고 동삼동 식은 굵은 빗살무늬(태선문)이다.

한강과 낙동강은 신석기 빗살토기 무늬에 있어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요즘 들어 돌출 된다. 한강과 낙동강 사이에 있는 금강의 문화권에서는 가는 빗살무늬와 굵은 빗살무늬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또 조성기법이 다른 빗살무늬토기도 나왔다. 기존의 이분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미호천 가의 신석기 유적인 청원 쌍청리 유적은 빗살토기의 분류에 대해 의문을 던져 준다. 한강 식도 낙동강 식도 아니기 때문이다. 해발 50m 구릉지대에서 나타난 신석기 집터 출토 빗살토기는 조형미로 보아 가히 비엔날레 출품 감이다.

높이 25cm, 최대 지름 20cm 정도 되는 원추형의 이 토기는 빗살무늬의 집합체이다. 주둥이 부분은 손톱으로 누른 듯한 손톱무늬가 여러 겹 띠를 두르고 그 아랫부분은 세모 띠와 무지개 무늬가 받쳐준다. 그 다음에는 맞 톱날 무늬가 이어지며 문살무늬(격자문)와 생선뼈 무늬(어골문)가 아랫부분을 장식한다.

하나의 빗살토기에서 이처럼 다양한 무늬가 나온 예는 매우 드물다. 빗살의 형태도 다양하고 굵기도 비교가 곤란하여 발굴팀인 국립청주박물관은 고심 끝에 ‘금강 식 토기’라 명명하였다. 기존의 이분법적 학설로서는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석기 토기를 분류하는데 있어 ‘금강 식 토기’는 쌍청리를 계기로 전면에 등장한다. 비단 쌍청리 뿐만 아니라 도내 여러 곳에서 출토되는 신석기 시대 토기들은 한강 식이나 낙동강 식으로 편입시키기가 곤란하다.

초기 철기시대의 토기도 그렇다. 청주 송절동, 봉명동, 신봉동 등지에서 출토된 초기 철기시대의 토기들을 보면 그야말로 내륙 적이며 충청도 적이다. 투박한 겉모양, 넉넉한 속공간은 왠지 모르게 충청인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여기서 나오는 토기는 같은 시기 다른 곳에서 나오는 토기와 또 다르다.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쇠뿔 손잡이 토기’라든지 1000cc 맥주 컵을 연상케 하는 손잡이 달린 바리형 토기는 우리 지역 출토토기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북대 발굴 팀은 이를 ‘충청도 식 토기’로 명명하였다. 출토토기의 여러 형태를 보면 마치 공예 비엔날레를 보는 듯 하다. / 언론인· 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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