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관학 교육기관으로 학교가 생긴 것은 고려 성종 6년(987년)이니까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종 5년(1127년)에는 전국 12목(지금의 도 단위)에 학교를 세우고 지방의 사대부 자녀의 교육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생긴 학교가 오늘의 향교의 모체이다. 청주도 그 때 12목의 하나였으니 학교가 세워졌을 것이며, 그 때의 학교는 문의면 양성산(養性山) 아래 창건한 것으로 추측하며, 오늘의 <청주향교>는 조선 태조 7년 각지방에 360개의 향교를 세우고 고등학교의 기능으로 인재양성을 했을 때 세운 것이라고 한다.
청주향교는 삼남(三南) 제일의 향교였으며, 세종 26년(1444년)에는 세종이 안질 치료차 초정(椒井)에 행차하였을 때 서적을 하사(下賜)한 일이 있었고, 세조 10년(1464년)에는 세조가 문묘(文廟)에 친히 제향(祭享)한 일도 있다고 한다.
조선의 청주향교는 왕이 특별한 배려를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창건 당시의 청주향교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지금의 청주향교는 조선 숙종 9년(1683년) 현령(縣令) 이언기(李彦紀)가 이곳으로 이전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주향교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누구나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어서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중요 건물은 가장 위쪽에 있는 대성전(大成殿)이며, 이 대성전은 홍전문(紅箭門:홍살문)에서 외삼문(外三門)을 지나 유생의 교실이었던 명륜당(明倫堂), 그 뒤의 내삼문(內三門)을 지나야 된다. 향교의 건물은 새롭게 신축한 석조 2층의 복지회관, 유치원 등의 현대식 건물이 지금은 더 우람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의 향교는 공자의 도의사상을 교육하는 곳으로 조선 시대의 인본주의 윤리를 깊이 뿌리박게 했으나 이 나라의 개화와 신학교의 등장으로 현재는 유림에서 봄 가을 석전대제(釋奠大祭), 초하루 보름 삭망봉심(朔望奉審)과 명륜학원 운영으로 한문, 서예, 예절을 가르치고 있다. 여름방학에는 학생에게 예절을 가르치고, 이 밖에 글짓기 및 서예 대회, 충효웅변대회, 도의선양 강연회, 예절상담, 효열표창, 전통혼례 등을 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이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에 삶의 좌표를 상실하고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은 잠시 이곳에 들러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봄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