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의 목마와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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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목마와 이인좌의 난
  • 임병무 고문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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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이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사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되었던 트로이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절세의 미모를 지닌 스파르타 왕비간의 금지된 사랑, 이로 인한 그리스 연합군의 침공, 아가멤논, 아킬레스, 헥토르 등 영웅들의 무용담, 트로이의 목마와 멸망 등 전쟁과 사랑에 얽힌 대서사시다.

트로이와 스파르타간 화친을 맺으러간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는 스파르타의 왕비 헤레네와 깊은 사랑에 빠져 그를 트로이로 데려온다. 이에 화가 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그의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에게 구원을 청해 아가멤논을 총대장으로 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정복에 나선다.

프리아모스가 지배하는 트로이는 소아시아반도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는 고대도시로 BC 3000년경부터 청동기 문화를 꽃피워왔다. 동서양을 잇는 트로이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리스 최고의 명장 아킬레스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좀체로 함락되지 않는다.

싸움에 지친 그리스 연합군은 철수를 하면서 거대한 목마(木馬)를 남기고 떠난다. 트로이는 이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전승물인줄 알았던 목마 안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성문을 열어 트로이는 잿더미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이는 멸망했지만 아킬레스 장군은 파리스 왕자가 쏜 화살에 발 뒤꿈치를 맞고 전사한다. 최고의 명장이나 발 뒤꿈치가 약점이다. 지금도 개개인의 약점을 일컬어 ‘아킬레스의 건’이라 부르고 의학에서 이 부분을 ‘아킬레스 건’이라 칭한다.

호메로스의 대 서사시는 오랜 역사를 통해 회자되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 서사시를 믿고 트로이 유적발굴에 착수하여 성공을 거둔다. 토로이 유적은 1층서부터 9문화층까지 존재한다. 슐리만은 거기서 나온 진귀한 유물, 금은보화를 독일 본국으로 가져간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을 점령한 러시아는 이 유물을 러시아로 옮겼다. 오늘날 트로이 유물은 여전히 국제분쟁거리로 남아있다. 위치는 터어키 영토이고 문화상은 그리스 문화이며 발굴자는 독일인이고 현재 보관자는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청주 읍성에서도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 영조4년(1728)에 있은 이인좌. 신천영의 난은 당파사움에 연루된 반란이었다. 소론이 노론을 몰아내기 위한 난으로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이인좌와 정희량 등은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옹립하려고 영남에서 모반하였다. 그후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신천영을 병사(兵使)로 임명하였다. 이인좌. 신천영은 청주성을 공격하는데 ‘트로이의 목마’같은 작전을 썼다. 즉 상여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성에 입성하여 병영을 기습했다. 병영에서는 패장(牌將) 양덕부(梁德溥)가 난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슬쩍 열어주었다.

상당산성 동암문(東暗門) 안쪽 벽을 살펴보면 ‘패장 양덕부(牌將 梁德溥)...’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는 상당산성을 쌓는데 공사 책임자 중의 하나다. 공사실명제로 인해 오늘날까지 그의 명예롭지 못한 이름이 성벽에 남아 있는데 누가 그랬는지 이름의 일부를 지웠다.

트로이의 목마는 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등장하는 작전이다. 터키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트로이의 목마’가 매스 게임으로 재연되었다. ‘아나톨리아 태양이 뜨는 땅’이라는 타이틀처럼 동방의 문명이 세상을 밝게 비추었으면 한다.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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