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비확충, 비상시 외화로 쓸 수 있는 금 확보하려한 전쟁의 야욕

연간 12톤에 달하는 금을 소비하지만 금이 한 덩어리도 나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하면 1930년대의 ‘한국판 골드러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70년 전의 한반도는 한해에 10조원 어치의 금을 캐내며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일본을 세계 5위의 금 생산국으로 만들어 주었다.

1933년 한 해에 조선땅에서 개발된 금광은 약 3200여군데. 이후 1943년 한국의 황금광시대가 막을 내리기까지 한해 생산량이 10여톤에서부터 30여톤까지 늘어났으며 금값도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이 광산을 뚫는 곡괭이질 소리로 시끄러웠던 시절이다.

1933년 ‘황금무용론’을 통해 황금열풍을 비웃던 채만식도 5년 뒤에는 김제와 천안 일대의 광산개발에 뛰어들었고, 사회주의자인 김기진도 혁명의 실탄을 확보한다며 금광행에 가세했다고 한다.

노다지를 만나 인생역전에 성공해 ‘황금귀(黃金鬼)’라는 명성을 얻었던 최창학은 일본군에 비행기 8대를 헌납한 전력이 있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김구에게 자신의 집(경교장)을 바친다. 그러나 김구가 암살당하고 정적이었던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집요한 세무조사에 시달리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노다지가 가져다 준 인생역전도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한국판 골드러시’가 시작됐을까? 답은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전봉관교수가 쓴 ‘황금광시대(도서출판 살림)’에 나와있다.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욕으로 당시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군비확보와 더불어 비상시 외화로 쓸 수 있는 금을 확보하는 일이 절실했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이 책에서 ‘조선총독부는 금 채굴을 장려하기 위해 금광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생산된 금은 고가에 매수하는 등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금을 캐내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 골드러시가 일어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일본 군부에 의해 정교하게 기획된 정책에 따라 한반도에 광풍이 불면서 10년만에 이땅의 금맥이 완전히 바닥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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