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ㄷ’자 안채구조변경 다시 검토해야 한다” 여론
동부리 고가 , 국가문화재지정 '준비중'

괴산군 동부리(인산리 450 - 1)에 위치한 벽초 홍명희의 생가는 지금 복원과정중에서 원형여부를 두고 브레이크가 걸렸다. 문제가 된 것은 안채의 구조가 당초 ‘ㅁ’자형이었으나 현재 ‘ㄷ’자형으로 변경돼, 지금 이를 두고 학계에서도 의견들이 분분한 것이다.

동부리 고가(古家)는 1728년 건축돼, 1861년 증축된 충북의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이다. 민족사학 순국 열사 홍범식과, 벽초 홍명희의 생가인 고가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점에서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이 명문가옥은 국어학자 홍기문과, 손자인 소설가 홍석중씨를 배출시켰고, 또 괴산의 의사들은 이곳에서 중부 최대의 독립운동인 ‘1919년 3월 19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 안채가 'ㅁ'자 구조인 괴산군 동부리 벽초 생가의 보수전 모습(좌)과 'ㄷ'자 구조로 변경된 현재의 모습.
이처럼 동부리 고가는 민족학적, 건축사적, 역사학적, 문학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역에서도 동부리 고가를 복원하고자 하는 모임이 1997년 결성돼 2002년 11월, 괴산군과 충북도가 생가매입과 복원을 확정함에 따라 해소됐다. ‘홍명희 생가복원 추진위원회’는 도종환 시인, 김정기 총장, 김승환 교수 등 문화계인사들이 대거 참여했고, 청와대와 국회 그리고 문광부와 충북도청, 괴산군 등에 청원을 하는 등 적극적인 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한 문화계 인사는 “그당시만 해도 홍명희 선생의 월북을 두고 정치적인 사상을 문제삼아 복원이 지연됐었다”고 회고했다.

동부리 고가, 문화재 지정 언제 되나
동부리 고가는 지난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 146호로 지정됐으나 90년 9월 원형변경 및 훼손을 이유로 문화재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돼 지정해제됐다. 다시 2002년 충청북도 민속자료로 재지정된 상태다. 당시 홍명희 생가를 매입해 살고있던 이복기씨와 그의 아들인 이종범씨가 이곳이 문화재 지정되면 매매가 되지 않는 것을 우려해, 문화재지정을 해제시켰다는 후문이다.

괴산군은 2002년 토지매입을 시작으로 생가 주변 담장설치, 임시복구 등을 해왔다. 총 39억원을 투입해 2006년까지 생가복원과 휴게시설, 주차장 시설을 만들 계획을 잡고 있다. 하지만 동부리 고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돼 국비를 받지 않는 이상 군비, 도비로서는 정비사업을 감당할 여력이 안된다. 따라서 괴산군은 현재 국가 지정문화재 신청을 위해 지난해 9월 도 문화재위원회에 신청했고, 도는 현재 문화재청에 낼 서류 제출을 준비중이다. 사실상 국가지정 문화재로 이번에 통과돼야지만, 군은 복원사업을 진행시킬수 있다.

현재는 국비 3억원, 도비 1억 5000만원, 군비 1억 5000만원을 들여 사랑채, 안채, 광채등의 복원작업을 완료됐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에 된 것은 바로 안채의 구조변경이다. 동부리 고가의 안채는 84년, 2002년 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도면을 살펴보면 명백한 ‘ㅁ’자 구조였다. 따라서 이 곳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도 왜 갑자기 ‘ㄷ’자로 변경됐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눈에 보기에도 대문에서 안채가 훤히 보이는 구조라서 시쳇말로 ‘남녀가 내외했던 시대’의 건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가옥 부분의 권위자로 알려진 명지대학 김홍식 교수는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고, 사랑채를 별채처럼 독립된 형태로 된 것이 인상깊었다. 이는 다른 양반 주택과 달리 사랑채를 내세우지 않은 독특한 형태였고, 또한 안채중심으로 생활했음을 알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84년 중요민속자료 지정을 위해 홍명희 생가를 조사했고, 그후 몇차례 홍명희 생가를 다녀갔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이곳이 홍명희 생가인줄도 몰랐다. 그러나 이 집만 보더라도 홍명희 선생 같은 인물이 태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근대화’에 대한 고민이 녹아진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번 안채의 구조변경에 대해서는 “80년대 조사 당시 홍명희가 살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ㅁ’자형’에서 ‘ㄷ’자형으로 변화는 학문적으로는 사회안정의 선후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ㅁ’자는 농사를 짓는 집이고, ‘ㄷ’자는 한마디로 도시형이다. ‘ㄷ’자 구조 였다면 시인이 농사를 안지어도 살수 있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사회적인 요건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딱잘라 구분짓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홍명희 생가를 복원할때 후대 사람들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돼 집을 변형시켜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인근 김기응 고가도 ‘ㅁ’구조다”
그렇다면 이번 안채의 구조변경은 왜 일어난 것일까. 괴산군은 지난해 9월과 10월 안채복원를 두고 동부리 고가에서 충북도문화재위원들과 두차례의 회의를 열었다.

괴산군 관계자는 “1차 회의 때는 건물복원 논의보다는 진행된 결과를 보고하는 의례적인 회의였고, 2차 때는 안채의 복원과 해체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고 말했다. 이날의 결론은 △우측 지붕면 좌측과 동안 좌우대칭으로 원형복원 △전면광부분 복원여부결정 (일주일후 1920년 이전에 건축되었다는 근거가 없으면 철거)△주초석높이 전체해제 복원 등 이었다. 사실상 전면 광부분이 전면 철거로 결정됐고, 이로인해 안채의 구조는 ‘ㅁ’자에서 이부분이 빠지면서 ‘ㄷ’자로 된 것이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충북대 김경표 교수는 “중요한 것은 생가복원의 시점을 어디로 잡느냐이다. 홍명희 선생이 살았던 시점에서는 ‘ㄷ’자 구조였다고 판단된다. 철거해보니, 전면 광부분의 부자재가몸채것과 차이가 있고, 또 지대높이가 달라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했다”라고 설명했다. 또 회의에서 정확한 자료를 위해 연대측정을 해보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성급한 판단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곳이 당초 ‘ㄷ’에서 ‘ㅁ’자로 변경됐는지, 아니면 또 처음부터 ‘ㅁ’가옥인데 6.25 폭격때문에 일부 보수된 ‘ㅁ’자 가옥인지 정확한 사료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동부리 고가는 인근에 있는 김기응 가옥(괴산군 칠성면 성산리)과충북의 대표적인 ‘ㅁ’ 가옥으로 손꼽혔다. 김교수는 “동부리 고가는 ‘ㅁ’자형 가옥으로서만도 가치를 갖고 있는데, 허물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의 향토 문인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면 문헌을 통해 동부리 고가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안사람들이 주로 사는 공간인 사대부 집안의 안채가 이렇게 훤히 뚫려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반응이다. 적어도 싸리울타리나 토담을 만들어 안채를 가려야 하며, 또한 이것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다시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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