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향토학자

   
산이나 벌판에 우뚝 솟은 남근석(男根石)을 보면 어떤 경외감과 함께 생명의 힘을 느끼게 된다. 자연 속의 남근석은 우연히 남근을 닮은 경우가 있고 인위적으로 손질한 것도 있다.

청동기 시대의 선돌은 대개 암수 한쌍으로 경계, 믿음, 표석 등으로 해석되나 후대로 오면서 기자(祈子)신앙의 대상으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옥천군 청산면 청정리에 있는 3기의 선돌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논바닥에 서 있는 1호 선돌은 영락없는 남성의 성기 모양이다. 끝 부분이 뾰죽하며 귀두(龜頭)가 뚜렷하고 요도를 의미하는 듯 구멍까지 뚫어 놓았다.

높이 180cm로 어른 키보다 큰 이 선돌은 발기된 모습으로 도도하게 청산 벌을 지키고 있다. 이 숫 선돌이 논바닥에 쓰러지면 마을에 동티가 난다하여 주민들이 ‘할아버지’라 부르며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

3호 선돌은 암선돌로 끝이 뭉턱한데 이 선돌에는 여성의 성기가 새겨져 있다. 길이 12cm, 폭 4cm로 묘사된 이 성기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 낯이 뜨거울 정도다. 암질이 검은 것인지 성기의 색깔조차 새까맣다. 여기에다 작은 돌로 비비며 치성을 드리다가 작은 돌이 성기에 찰싹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청원군 문의면 도원리 어은 마을에는 4기의 선돌이 있다. 어은 1호 선돌은 숫 선돌로 마을사람들은 ‘수살(水薩)장군’이라 부른다. 수살장군에서 150m 떨어진 곳에 있는 2호 선돌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로 푸대접을 받고 있다. 이 선돌은 본 부인이었으나 소박을 맞았고 3호 선돌은 배가 불룩하다. 수살장군은 3호선돌과 사이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4호 선돌이다.

청주시 죽림동 ‘집너머 방죽’ 왼쪽으로 야막한 야산이 있는데 이곳엔 남녀의 성기가 결합된 희귀한 형태의 ‘남녀 합근석’이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지성으로 위하는 기자석으로 속칭 ‘무당바위’라 부르는데 10여 년 전 감쪽같이 사라졌다. 동이 트기 전, 남의 눈을 피해 자식 낳기를 바랐던, 여심이 새겨진 마법의 돌로 꽤 효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돌이 없어진 후에는 마을에 아이울음 소리가 잘 들려오지 않는다고 한다.

 1976년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에서는 소나무를 깎아 만든 남근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도 남근숭배사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일본의 나라시대 헤이조 궁 우물에서도 이와 비슷한 남근이 나왔다. 속리산 등 심산 유곡의 일부 사찰에서는 ‘송이(松耳)’ 놀이‘라는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일종의 남근제 성격을 띤 놀이이다. 심신을 닦는 엄숙한 도량에서도 심심 파적으로 송이놀이가 등장하였으니 이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어떤 탈출구로 작용했던 것이다.

남근제의 고향은 바닷가다. 바다에 남근을 받치며 풍어를 빌었고 비명에 이승을 하직한 처녀의 한을 달랬다.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안인진 2리에는 큰 당이라 불리는 서낭당과 작은 당이라 불리는 ‘해랑당’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1년에 두 번 당제(堂祭)를 지내고 3년마다 한번씩 당굿을 한다. 처녀로 익사한 기녀 해랑의 한을 당굿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남근은 소나무 상순(上筍)으로 만들었는데 발기된 형태보다 약간 크다. 붉은 황토를 칠해 피부색을 내었다. 강릉부사를 따라 놀이 길에 나선 해랑이 벼랑에서 그네를 뛰다 그만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다. 제천에서 거대한 남근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훼손되는 일 없이 잘 보존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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