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영정은 1938년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이 이모(移模)한 관복(官服) 전신(全身) 교의좌상(交椅坐像)이다. 목은 영정이 봉안된 이 곳은 숙종 36년(1701년)에 창건하여 수차례 중건된 것으로 영당, 강당, 내ㆍ외삼문, 홍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있는 '주성강당(酒城講堂)'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조선시대 목부재와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은영당은 시내에서 산책으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고, 주차공간도 충분하여 가보기가 수월하며,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울창한 노송 숲이 있어 유치원ㆍ 초ㆍ중학교의 소풍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문화탐방 코스의 하나가 되어 있고, 여기에서 목은의 생애를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
이 때 목은이 창왕을 옹립한 것이 죄가 되어 목은의 장자를 극형으로 국문하여 죽게 하고, 목은과 차자를 역모로 몰아 귀양보내고,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 다음 공양왕(1392년)도 몰아내고 새왕조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조선이다. 이성계가 즉위하고 정도전 일파가 세력을 잡으면서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하였으며, 목은의 차자가 유배지로 가느라 거창에 이르렀을 때 정도전이 사람을 보내 죽였다.
목은의 3남은 멀리 귀양 갔다가 나중에 풀려났으며 목은은 청주 옥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목은이 청주옥에 있을 때 엄청난 장마가 있었는데 물이 관찰사에 범람하고 옥에도 물이 들어왔을 때 목은이 은행나무에 올라가 있으니 다른 것은 모두 물에 쓸려나가는데 목은이 올라가 있는 은행나무는 그대로 안전했었다. 이는 하늘도 목은이 죄 없음을 증명한 것이라는 조정의 여론이 있어 유배에서 풀려났다고 하며, 그 때의 은행나무는 청주 중앙공원에 지금도 웅장하고 싱싱하게 있는데 이 나무를 '압각수(鴨脚樹)'라고 부른다. 그 나무의 뿌리가 물갈퀴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고, 잎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목은의 인품에 항상 경의를 갖고 있던 이성계는 목은이 고향에 있을 때 찾아와 "나를 버리지 말아주게"하고 청하니 "나라 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잖소? 망국의 대부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해골을 가져다 고산에 묻을 뿐이오"라고 곧은 절개로 답했다고 한다. 조선 태조 4년에는 왕궁으로 초빙하여 친구로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는 중문까지 나가 읍하며 배웅했다고 하니 비록 권세 때문에 쿠데타를 하였지만 워낙 거목은 벨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여러 차례 회유했지만 조선왕조에 협조하지 않는 목은을 살해하려는 간신배를 이성계는 나무랐으나 태조 5년(1396년) 5월 7일 이방원과 정도전 일파는 여주 신륵사에서 이색이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시켜 술과 안주를 보내며 어주라 속였다. 이를 수상히 여긴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했으나 목은은 "명이 하늘에 있는데 죽고 사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랴?"고 하면서 그 술을 마셨으니 그의 고매한 충정과 의리와 의연함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독이 든 술인지 알면서 마시고 배 안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했다고 한다. 3남이 목은의 시신을 거두고 한산의 가지고개에 장사하였으며 그 후학들은 지금까지 목은을 기리고 있다.<김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