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노송 밭에 대유학자의 혼이…<김태하>

▲ 영당 입구에 있는 목은 신도비 청주 북쪽 4차선 도로로 가다가 수름재에서 약 200m를 더 가면 '목은영당'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거기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전방 500m 지점에 노송 우거진 산이 보이고, 그 노송 아래 '목은영당(牧隱影堂)'이 자리잡고 있다.목은영당은 고려시대 대유학자(大儒學者)이며 삼은(三隱)가운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목은 영정이 처음 그려진 연대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 태조 4년에 권근이 남긴 화상찬 기록에 이미 있는 것으로 보면 태조 4년(1396년) 이전에 그려진 것이 확실하다. 이 영정은 목은의 손자가 서울 수송동 영당에 봉안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장에게 약탈당했던 것을 목은의 외손인 부산청사 여우길이 통신사로 일본 동경에 갔을 때 우연히 이 영정을 발견하여 가지고 왔다고 한다. 기적과 같은 우연이었다. 효종 5년(1654년) 후손 휘 단이 김명국(金鳴國) 화백에게 하반신이 없어진 구본을 바탕으로 두 본을 모사하여 하나는 수송동 영당에, 다른 하나는 충남 한산의 '문헌서원'에 모시게 했다. 그 후 영조 32년(1767년)에 후손 휘 수옥이 문헌서원의 구본을 모사한 영정 두 본을 더 제작하였는데 이들 영정은 모두 보물 제 1215호로 지정되었다. ▲ 목은영당 전경
지금의 영정은 1938년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이 이모(移模)한 관복(官服) 전신(全身) 교의좌상(交椅坐像)이다. 목은 영정이 봉안된 이 곳은 숙종 36년(1701년)에 창건하여 수차례 중건된 것으로 영당, 강당, 내ㆍ외삼문, 홍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있는 '주성강당(酒城講堂)'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조선시대 목부재와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은영당은 시내에서 산책으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고, 주차공간도 충분하여 가보기가 수월하며,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울창한 노송 숲이 있어 유치원ㆍ 초ㆍ중학교의 소풍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문화탐방 코스의 하나가 되어 있고, 여기에서 목은의 생애를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

목은은 1328년에 가정공(稼亭公)이 문과급제 후 8년이 지나 31세가 되었을 때 외가인 경북 영덕군 영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와 자랐는데 어찌나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난지 8세부터 독서당과 산사에서 학문에 몰두할 때 스승의 찬사가 많았다. 그런 목은은 14세에 진사 성균관시에 수석으로 합격해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16세에 별장(정7품)을 받고, 만천하에 실력을 과시하여 고려 최상층의 가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목은이 19세에 장가들려 할 때 당시 최고 명문 집안에서 서로 사위를 삼으려 해서 혼례 당일까지 다툼이 있었으며, 당대 제일의 명문 집안인 안동권씨에게 장가 들었다. 26세 때인 공민왕 2년(1353년)에 고려 문과에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고, 다음해 3월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향시에 장원급제하고, 황제가 친림하는 전시에서 2등(장원은 원나라 사람이 아니면 안되었음)으로 합격하여 한문의 고장인 중국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 후 원과 고려에서 여러 직책을 담당하다가 44세에 재상 반열에 오르고, 58세에는 지금의 국무총리와도 같은 문하시중이 되었다.환갑이 되던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와서 우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할 때 우왕의 세자인 창왕을 옹립하였는데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신돈의 혈육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 목은영정이 봉안된 영정
이 때 목은이 창왕을 옹립한 것이 죄가 되어 목은의 장자를 극형으로 국문하여 죽게 하고, 목은과 차자를 역모로 몰아 귀양보내고,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 다음 공양왕(1392년)도 몰아내고 새왕조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조선이다. 이성계가 즉위하고 정도전 일파가 세력을 잡으면서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하였으며, 목은의 차자가 유배지로 가느라 거창에 이르렀을 때 정도전이 사람을 보내 죽였다.

목은의 3남은 멀리 귀양 갔다가 나중에 풀려났으며 목은은 청주 옥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목은이 청주옥에 있을 때 엄청난 장마가 있었는데 물이 관찰사에 범람하고 옥에도 물이 들어왔을 때 목은이 은행나무에 올라가 있으니 다른 것은 모두 물에 쓸려나가는데 목은이 올라가 있는 은행나무는 그대로 안전했었다. 이는 하늘도 목은이 죄 없음을 증명한 것이라는 조정의 여론이 있어 유배에서 풀려났다고 하며, 그 때의 은행나무는 청주 중앙공원에 지금도 웅장하고 싱싱하게 있는데 이 나무를 '압각수(鴨脚樹)'라고 부른다. 그 나무의 뿌리가 물갈퀴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고, 잎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목은의 인품에 항상 경의를 갖고 있던 이성계는 목은이 고향에 있을 때 찾아와 "나를 버리지 말아주게"하고 청하니 "나라 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잖소? 망국의 대부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해골을 가져다 고산에 묻을 뿐이오"라고 곧은 절개로 답했다고 한다. 조선 태조 4년에는 왕궁으로 초빙하여 친구로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는 중문까지 나가 읍하며 배웅했다고 하니 비록 권세 때문에 쿠데타를 하였지만 워낙 거목은 벨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여러 차례 회유했지만 조선왕조에 협조하지 않는 목은을 살해하려는 간신배를 이성계는 나무랐으나 태조 5년(1396년) 5월 7일 이방원과 정도전 일파는 여주 신륵사에서 이색이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시켜 술과 안주를 보내며 어주라 속였다. 이를 수상히 여긴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했으나 목은은 "명이 하늘에 있는데 죽고 사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랴?"고 하면서 그 술을 마셨으니 그의 고매한 충정과 의리와 의연함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독이 든 술인지 알면서 마시고 배 안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했다고 한다. 3남이 목은의 시신을 거두고 한산의 가지고개에 장사하였으며 그 후학들은 지금까지 목은을 기리고 있다.<김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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