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향산은 웅장하고 북측 작가들은 따뜻”
평양에서 울고 웃었던 5박 6일, 희망 발견

▲ 김승환 회장 2005년 7월 25일(월) 오후 4시. 평양발 인천행 고려항공 JS615기는 98명의 남측 대표단을 실고 휴전선을 넘어 남행(南行)을 하고 있었다. 눈물서린 귀환(歸還)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골이 내려온 그 길이고 벽초 홍명희 선생은 끝내 내려오지 못한 그 길을 우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새벽 다섯 시의 백두산 장군봉에 뜬 쟁반 같은 달도, 동녘의 붉은 해도, 신묘한 백두산 천지의 맑은 물도 모두 꿈만 같다. 강열도 999의 저 무시무시한 역사의 시간은 이제, 과거라는 이름으로 가뭇없이 사라져 간다. 천 갈래 꽃비 내리듯 상념이 쌓인다. 지난 6일이 주마등 환상처럼 펼쳐진다. 희망과 미래를 안고 떠난 여로(旅路)였다. 분단 60년, 반식민 외세의 60년을 넘어 세월의 피안 속에 민족과 통일을 찾아 떠난 여로였다. 비행시간은 한 시간여, 60년의 시간이 한 시간으로 압축되는 절대시간의 민족작가대회였던 것이다. 내가 작단(作壇) 말석에서 서성거리게 된 것이 1980년대 중반 도종환, 김창규, 김시천, 김성장, 김희식 시인 등과 함께 했던 <분단시대>였기에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당시 나는 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북한문학을 연구하고 있었고 진보적, 민족적 세계관을 가지고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에 대한 순결한 열망이 보잘 것 없는 내 문학의 첫 자취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인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정신으로 문학을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돌이켜 보면 회한과 고난도 적지 않다. 고난과 희망의 교차를 정리해 두어야 하겠기에 곤한 몸을 일으켜 쓴다, 다음과 같이. 첫날부터 고난의 행군이었다. 20일(수) 오후 3시로 예정되어 있던 공식대회는 네 시간 연기된 7시 직전에 시작되었다. 남북민족작가대회에 해외까지 포함하느냐의 문제로 논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북측의 작가들은 오전 11시부터 자리에 나와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남측의 작가들이 입장하는 인민문화궁전의 대회의실은 알 듯 모를 듯한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남측의 작가들이 입장하는 것을 그야말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북측 작가들의 심정 역시 형언하기 어려운 착잡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미묘한 기류를 감지한 남측의 작가들은 함부로 박수를 칠 수도 없었고, 환한 웃음도 쉽게 열리지 않았고, 다정한 손을 흔들어주지도 못했다. 그처럼 60년 분단의 힘은 육중했다. 민족작가대회의 최대 성과인 문학예술에 대한 합의는 <공동선언문>의 형태로 김형수와 장혜명에 의해서 낭독되었다. <국내외의 우리 민족문학인들은 민족 분단 60년 만에 처음으로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유서 깊은 평양에 통일 애국의 한마음을 안고 모였다. 민족문학과 민족정서가 상봉한 6.15 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는 온 겨레의 축복과 전 세계의 기대 속에 통일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시대와 역사 앞에 지닌 민족문학인의 숭고한 사명을 자각하고 함께 손을 잡고 마음을 합친 우리들은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 아래 하나로 굳게 뭉쳐 조국의 통일을 기어이 이룩해 나가려는 서로의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확인하였다>라는 이 합의야말로 미래 통일조국의 세계관과 창작방법론의 원칙이 될 것이다. 참으로 어렵게 도달한 공동선언문에 대한 창작방법에 대하여 충북의 도종환 시인이 발표를 했다. 현실과 민족의 문제가 창작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과 작가들이 민족문제에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작가가 역사와 철학에 토대한 현실에 대한 고민이 없이 그저 감상과 지적 사치(奢侈)에 머문다면 그런 사람을 작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요지는 분단시대의 분단문학을 넘어선 통일시대의 통일문학을 지향하자는 것, 그 실천을 위하여 통일문학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자는 것, 역시 그 실천을 위하여 통일문학상을 제정하자는 것, 그리고 매년의 작가교류를 위하여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만나자는 것 등이다. 이틀째. 21일(목)과 22일(금)에는 조선/북쪽의 여러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그 중에서도 1948년 남북제정당연석회의에 참가한 남측의 대표단이 북측과 만나서 허심탄회한 환담을 나눈 대동강의 쑥섬을 참관한 것이 인상 깊었다. 쑥섬에서는 북측의 김일성 대표와 남측의 김구, 김규식, 홍명희 등이 편안한 분위기속에서 민족문제를 논의했던 역사 깊은 장소다. 평양 역시 무더웠고 자우룩한 운무 또한 서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민족도 하나, 운무도 하나. 드디어 넷째 날인 23일(토) 오전 2시 30분, 각 방에서는 소란하고 분주한 소리가 두런스럽다. 백두산 정상에서 열리는 <통일문학의 새벽>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소형 버스에 나누어 타고서 한 시간 정도 백두산을 행하여 가는 모습은 너무나 특별했다. 1진과 2진으로 나누어서 오르는 그 광경은 마치 전선으로 향하는 전사(戰士)의 행렬과 같이 인상 깊었다. 아직 어두운 하늘과 숨결을 멈추지 않은 대지, 붉게 터오는 동녘의 해, 나즉한 숨결 등은 자작나무로 알려진 봇나무와 잎이 아름다운 이깔나무 사이로 신선한 희망을 주었다. 새벽 5시, 백두산 정상에서 있었던 <통일문학의 새벽>은 민족문학사, 나아가 민족예술사와 민족문화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분단과 외세를 극복하고 통일과 자주의 민족문학의 이정표를 새긴 행사였기 때문이다. 보름 어름이어서 그런지 서녘에는 쟁반 같이 둥근 달이 떴고, 동녘에는 붉은 해가 솟고 있었으며 천지는 고요하여 그 교교(皎皎)한 자태를 깨끗이 보여주는 그야말로 드물고도 기묘한 광경이었다. 북측이 리호근 시인과 남측의 은희경 작가가 사회를 보면서 남측의 고은, 백낙청, 안도현, 북측의 홍석중 오영재 해외의 김학렬 등의 낭송과 연설 등이 이어졌다. 뒤편으로 비낀 햇살에 천지의 고즈녁한 새벽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허리에 걸린 구름 위로 퍼지는 민족통일의 열망은 뜨거웠다. 그 위로 애절하게 타계한 김남주 시인의 <조국은 하나다>가 들려온다. “조국은 하나다 /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 남모르게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 조국은 하나다.” 백두산 정상 남북 해외동포 작가들의 민족통일 만세가 울려 퍼질 때, 백두에서 한라까지 천하도 함께 진동(震動)했다. 조국통일의 성전(聖殿)에 바쳐진 시인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감격을 안고 다시 삼지연 공항으로 와서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을 향했다. 고려호텔에서 잠시 짐을 정리하고 나서 묘향산행 버스에 올랐다. 저녁 늦게 도착한 묘향산은 웅장하고 기묘한 자태를 감추지 않았다. 소백산의 웅장함과 금강산의 기기묘묘함을 함께 갖추었다는 묘향산에는 보현사가 있고 조선시대의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묘향산 호텔 예술소조의 공연은 특별했다. 북측/조선에서는 예술과 과학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조는 중규모 이하의 인원이 규모 있는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노래와 춤, 악기 공연을 중심으로 기량이 높은 연기자들이 공연하는 형식이다. ▲ 민족작가대회 본회의
24일(일)에는 북측인 조선이 자랑하는 국제친선전관람을 관람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선물들을 전시한 인상 깊은 곳이었다. 평양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인민문화궁전으로 향하여 오후 7시 20분부터 시작된 환송만찬에 참석했다. 부총리가 주재하는 격조 있는 행사였다. 그런데 다소 특이한 장면이 연출되었으므로 기록해 두어야 하겠다. 주석단의 바로 맞은편에 충북의 작가를 배치함으로써 모든 참가자들은 그간 충북 작가회의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남측과 북측은 자리 문제를 두고 숙의를 했는데 벽초 연구가인 강영주 교수와 함께 도종환, 김창규, 김승환 등 세 사람의 충북 작가들을 맨 앞 열의 정중앙에 위치시킴으로써 충북작가회의의 진정성과 진실을 남북이 모두 인정하는 형식을 갖추어준 것이다. 신뢰와 진정, 성실과 겸손이야말로 위대한 힘이었으니 앞으로도 언제나 그래야 할 것.

여덟 명이 앉은 그 테이블에는 벽초의 손자이자 ‘황진이’의 작가인 홍석중, 일본의 저명한 한국문학연구자 김학렬 등이 있었는데, 2번 테이블인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이 벌어졌다. 홍석중 선생은 호탕하고 명민했으며 열린 자세와 마음으로 남쪽의 작가들과 대화를 풀어나갔고 각 언론사 역시 홍석중에 대한 취재 열기로 뜨거웠다. 곧 2번 테이블은 전체 분위기를 주도했다. “김정일 장군님께서 민족작가대회가 잘 진행되는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라고 전하는 홍석중 씨는 충북의 작가들이 보여준 진정성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김순영 작가가 삼일에 걸쳐 만든 사진첩을 드는 순간 그의 눈에는 설핏 눈물도 서렸다. 충북, 청주, 괴산을 되뇌이는 그의 눈에서 이미 통일은 시작되고 있었다.

2000년부터 지속적으로 홍석중 작가를 청주에 초청하여 홍명희 문학제를 개최하고자 기울인 노력, 홍명희 선생의 생가를 보전하기 위하여 바친 정성, 벽초 문학비가 당한 수난(受難), <벽초 홍명희 학술회의>의 전망 등 우리 과거와 미래가 명주처럼 비단처럼 펼쳐지고 있는 인민문화궁전의 연회실. 홍석중, 강영주, 김학렬이 가세한 충북작가단은 어느덧 전체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지난 시절 홍명희 문학제와 분단극복 통일지향의 의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으니 이 또한 감격스런 일이 아닌가!
2번 테이블 여덟 명이 합창하는 <우리 민족 끼리>는 남측의 북쪽에 대한 예의이자 서로에 대한 이해였고 <6/15공동선언 실천>은 북측의 남측에 대한 예의이자 이해의 자세였다. 그야말로 통일시대 통일문학의 횃불을 충북작가들이 올린 셈이어서 기뻤다. 1996년 제1회 벽초 홍명희 문학제 때 벽초 홍명희라는 이름을 빼지 않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하리라고 행사 당일까지 옥죄던 살얼음도 이젠 녹았다. 벽초 문학지를 망치로 깨부숴버리겠다고 하던 적대감도 상당히 눅어졌다. 감사한 일이다. 그 동안 진보적 예술가들은 민주주의, 민중, 민족, 반제, 반패권, 반외세, 자유, 표현미학 등을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구보수주의자들의 광기(狂氣)서린 공격을 받아야 했던 것인즉, 어찌 감격이 없을손가! 그날 밤 우리는 평양에서 울고 웃었다. 희망과 환희와 비장의 복합적인 감정이 우리를 내리 누르던 그 밤에. < BR>
▲ 백두산 정상에서 열린 ‘통일문학의 새벽’시낭송회. 25일(월) 5시 정각 12초에 인천공항에 바퀴가 닿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한 개인이 사는 생존의 형식과 집단과 사회가 존재하는 형식에 대한 생물학적 고민이 깊어 졌다. 왜 하나였던 우리가 그런 차이를 보여야 하는 것인가? 긴 말을 줄이자. 분명한 것은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타자를 인정할 때 주체가 주체인 것이니 말이다. 6일간의 행사 중, 남측 작가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속출했고 북측 작가들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남측 작가의 언행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차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으로부터 대화는 시작되는 것이고, 대화를 통하여 이질성은 극복되는 것이다. 사랑과 인내는 이런 경우에 필요한 어휘. ▲ 왼쪽에서 두번째 부터 김창규 목사, 홍석중 소설가, 김승환 회장(필자), 도종환 시인이다.
다시 지난 6일을 돌이켜 본다. 인민문화궁전에 울려 퍼진 <6.15 공동선언 만세!> <민족작가대회 만세!> <조국통일 만세!>의 열기가 귓가에 쟁쟁한데, 나는 이 역사의 강열도 앞에서 냉정의 얼음으로 열기를 식히고 있다. 그렇다, 이 감격스런 장면은 역사의 시간이다. 그 현실의 모순을 잠재우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민족, 해방, 통일, 반자본, 반제, 반패권 - 이런 것들인가! 민족도 하나, 언어도 하나, 강토(疆土)도 하나인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할 일은 없을 것 아닌가? 다짐한다. 냉정하자. 침착하자. 감정은 논리가 동반되지 않으면 한갓 허상에 불과하리니, 우리 냉정하고 침착해야 한다. 나는 내면의 깊은 심연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냉정과 냉혹이라는 현실을 품속에서 꺼냈다.

나는 이번 민족작가대회에 참가하면서 새삼 역사의 운명을 느꼈다. 서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역사의 덧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강하게 끄는 또 다른 힘은 민족이라는 운명이었다. 한 개인이 그렇듯 민족도 운명이 끄는 마차를 타고서 저 우주를 가는 것이다. 그렇다. 이 운명의 길을 따라 우리는 간다, 희망의 미래 조국통일로. 우리는 저 하늘 창천의 붕정만리(鵬程萬里)의 길을 간다, 민족예술의 희망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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