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석양빛을 깃 폭에 걸고/ 흘러가는 가는 저 배는 어디로 갔나/ 해풍아 비바람아 부지를 마라/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아,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 돛대야”

한국의 국민가수 이미자가 60년대에 불러 히트한 ‘황포 돛대’ 노랫말이다. 목소리 자체에 한국적인 정서를 가득 담고 있기 때문에 이미자의 노래는 부르는 곡마다 히트하였고 그 중에서 ‘황포 돛대’는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앨범이다.

황포돛배는 광목에다 황토 물을 들여 돛대의 깃 폭으로 삼은 우리나라 대표적 상선이다. 그 배가 언제 출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장보고가 청해진을 근거지로 하여 한, 중, 일 삼각 무역을 하고 해상왕국을 꿈 꿀 당시부터 황포돛배는 출현한 것 같다.

엔진 없이 삿대와 돛대로 방향을 잡고 바람의 힘으로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험난한 바닷길을 항해한 황포돛배는 분명 무역의 선구자요 조선산업의 원조였다. 황포돛배는 항구마다 물화를 풀어놓고 또 어디론가 떠난다.

바다가 황포돛배의 주무대였지만 내륙 깊숙이 강변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남한강, 금강, 예성강,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니 황포돛배가 정박하는 강변에는 개펄장터가 들어섰다.

바다에서 배가 정박하고 출항하는 곳은 ‘항구’이지만 강에서 정박하는 곳은 포구(浦口)라 했다. 마포, 영등포, 매포 등 지명 끝에 포(浦)자가 들어가는 곳은 거의가 강가 마을이다. 금강의 황포돛배는 군산에서 거슬러 올라왔다. 금강에는 5대 포구가 있는데 청원군 부강은 이 중 하나로 소금 배의 종착역이었다.

한국플래스틱 옆 부강 4구에 위치한 구들기(구평:鳩坪)장터는 금강 상류에서 흥청대던 개펄장터다. 지금은 모두 농경지로 변해 그 흔적을 알 길이 없으나 개화기까지는 청주, 문의, 보은, 회인 일대에 소금과 수산물을 공급하던 숨구멍이었다.

어찌나 수산물이 흔했던지 ‘명태로 부지깽이를 하고 김으로 불쏘시개를 했다“는 말이 부강 일대에는 아직도 구전돼 내려온다. 소금 값은 대개 소금 한 짝에 쌀 한 말과 맞바꿔졌으며 비쌀 때는 쌀 한말 값을 넘기도 했다.

소금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강변마을로 전해지면 부강 주민들은 물론 충남 대덕군 구즉면과 연기군 금남면 장꾼들까지 쇠일 나루, 검시 나루, 새오개 나루, 빙이 나루를 건너 구들기 장터로 모여들었다.

이곳에서 물건을 뗀 소금장수, 젓갈장수 들은 젓 동이를 지게에 지고 열고개, 염치, 수레너미 고개, 안심이 고개를 넘어 보은, 문의, 청주 장으로 향하였다. 청석학원 설립자인 고 김원근 옹도 부강~청주 장터를 오가며 젓갈장수를 하였다.

황포돛배가 금강을 거슬러 올라 올 때는 한 삭(보름)정도 걸렸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삿대로 젓는 것이 부족하여 여울목에서는 사공이 내려 배를 밀어 올렸다. 반대로 내려갈 때는 고속도로다.

해거름에 부강에서 배를 띄우면 새벽녘에 부여에 도착하였다. 물론 내려갈 대는 올라올 때와 반대로 황포돛배 안에는 내륙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로 가득 찼다. 구한말에 배명환(裵明煥)이라는 뱃사공은 아직도 전설적 존재다.

아무리 풍랑이 세어도 그가 삿대를 잡으면 황포돛배가 살같이 금강 포구를 오갔다. 그 정취어린 황포돛배가 부강, 현도 일대에 재현된다고 한다. 조상의 슬기를 뒤돌아보며 금강 상류의 풍정을 완상해보는 것도 별난 이벤트라 하겠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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