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비(嚴妃)의 현몽으로 복원된 사찰 <김태하>

청주의 무심천 서편 벚나무 가로수길의 서문대교와 운천교 중간 지점 즉 청주시 흥덕구 사직1동 216-1번지에 국가보물 제985호(1989. 4. 10.)로 지정된 미륵칠존불을 모신 대한불교 조계종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이 사찰은 시내 가운데 있고, 교통이 편리하여 찾아보기가 용이하다.

  삼일수심천재보(三一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 一朝塵)

사찰 입구 우측 문주(門柱) 전면에 새긴 이 문구가 먼저 우리네 일상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 용화사 전경 삼일의 마음 수양은 천 수레의 보물과 같지만 백년 욕심내서 모은 재물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이 교훈으로 잠시 머리를 맑게 하고 두 문주의 앞뒤를 보면 '믿음은 공덕과 선에 근원이 있다' ,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깨끗한 마음이 불교다' , '자비를 베풀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면 그것이 부처다' 이런 의미의 글을 음미하고 사찰 안으로 들어서면 남향으로 건축한 웅장한 2층의 법당이 있다.위층에는 삼불전(三佛殿), 아래층에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라는 현판이 찬란하다. 삼불전은 이 법당의 7불 가운데 3개의 거대한 미륵불을 주존으로 한 이름이고 용화보전은 여러 부처가 함께 있는 부처의 세계를 일컫는 이름 같았다.경내를 보니 법당 우측에 선방이 있고, 법당의 앞을 비켜서 우측에 2층건물이 있는데, 위층은 '충북불교회관'이란 간판이 걸려 있고, 아래층에는 '용화유치원'이란 간판이 있어서 이 사찰에서 하는 포교사업의 일부를 짐작하게 한다.이 사찰의 내력은 참 재미있다. 광무 5년(1901년) 나라 안에는 기근이 심하고, 밖으로는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어 오고,국력이 쇠하여 민심이 흉흉한 때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비(嚴妃)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잠을 자던 엄비가 천지가 요동하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보니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뻗쳐오면서 미륵이 일곱 선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나서 "우리는 청주에 있는 석불인데 몸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니 구하여 큰 절을 지어 달라. 우리에 대하여는 청주군 지주에게 물어보라"고 한 다음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엄비는 이 사실을 고종에게 고하여 어명으로 청주군 이희복 군수에게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청주군 이희복 군수도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었다. 3일 후 어명을 받은 이희복 군수는 자신의 꿈이 엄비의 꿈과 동일한 것은 필시 사연이 있을 것이라 믿고 조사를 하니 무심천 늪에 석불이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늪의 물을 퍼내니 7존의 석불이 있었다.이희복의 보고를 받은 엄비는 곧 그곳에 15칸 규모의 큰 사찰을 짓도록 하였다. 사찰을 짓기 위하여 상당산성의 보국사를 옮겨 왔다는 설도 있고,청주연혁지에는 상당산성 우후(虞侯)의 구 청사 운주헌(運籌軒)을 무심천 서쪽으로 이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찰 이름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용화사(龍華寺)라 하고, 7존불을 여기에 모셨다. ▲ 보물 제985호로 지정된 용화사 칠존석불
그러나 6.25 때 사찰이 불타고 7존불이 노천에서 방치상태로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2년 신도들의 모금으로 미륵보전을 세웠다. 그리고 1993년 그 법당을 헐고 지금의 2층 법당을 지었다.

전설처럼 신묘한 소원성취와 안가태평의 효험이 있는 것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신도의 발길이 그치지 않아서 지금은 전국 제일의 도량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 사찰의 7존불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주변에는 흥덕사지, 운천동 절터, 철당간이 있던 용두사, 많은 유물이 나온 사뇌사 등이 가까이 있었고, 미처 조사되지 않은 절터들이 주변에 또 있을 것으로 미루어 보아 7존불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모은 것이라는 것이다.

인근 지역 노인들 사이에는 자기 아버지가 흩어진 석불을 용화사로 옮기는 일을 했다는 분도 있고, 어떤 석불은 늪의 축대처럼 방치되어 있어서 거기에 걸터앉아 낚시를 했다고도 하고, 어떤 석불은 갑오농민전쟁 때 관군의 총탄을 피하는 방어물이 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용화사 주지 스님에 의하면 이 불상은 대체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조각 솜씨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7존불은 서로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하며, 무관하더라도 부처님을 믿는 불교 신앙에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법당에 들어가 석불을 보면 그 높이가 5.5m에서 3.2m, 2.7m, 2.1m, 1.9m, 1.4m로 다양하고, 입상과 좌상이 섞여 있고, 시무외인을 취하거나 보병을 들고 있는 등 손의 자세도 각각이다. 모두 어깨를 감싼 법의를 입고 있으나 옷자락의 두께와 주름의 조각 수법과 솜씨는 조금씩 다르다.

이들 7존 석불은 그 모양과 솜씨가 불교 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고, 특히 3.2m의 불상은 당당한 체구에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만도형의 가사를 입어서 국내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것이다. 불상 뒷면에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어서 우리 나라에서 단 하나의 특이한 것인데 이 불상을 벽에 바짝 붙여 놓았기 때문에 지금은 그 나한상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 노천에 방치되어 있던 용화사 7존석불
전면 5칸 측면 4칸의 법당 밖을 돌면서 벽에 그린 불화를 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득도와 포교의 업적을 생각해 본 다음 법당 계단을 내려서면 근래에 세운 듯한 5층 8각 석탑의 금빛 찬란한 찰주와 옥개, 8귀의 맑은 종소리가 반긴다.

경내를 돌아보고 아침저녁으로 울려주던 범종루에 올라가보니 높이 230cm, 구경 143cm, 중량 1천관의 범종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700여명의 동참으로 만들어진 범종 연기문에는 괴롭고 어두운 것을 쫓아내고 즐거운 지혜를 얻고,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이 연기문을 읽어보고 심호흡을 한 다음 허리를 펴고 무심천을 바라보면 물은 유유히 흐르고, 하상도로에는 수많은 차량이 질주하는데 도심 저편의 우암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변함없어 나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여가 시간에 가족과 함께, 친지와 함께 이 용화사를 찾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좋은 보양(保養)이 될 것 같다.<김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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