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낯으로 국민들을 볼 수 있겠는가. 대통령으로 할 수 없이 손을 흔들면서도 얼굴에 철판을 까는 심정이었다. 제 자식들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심판 받는 데 대해 조금도 이의 가 없다. “
지난 15일 청와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김대중대통령은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 진출 신화를 만들어낸 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광주구장을 찾았을 때의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최근에는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내정자를 둘러싼 부적격 논란까지 가세하여 권력주변이 누수의 정도를 넘어서서 초토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권력의 성쇠는 권력이 현실에서 가지는 통치력의 안전도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통치력은 권력이 아무리 부패하더라도 군대나 관료기구가 잘 움직일 경우 안전한 경우가 많다. 군사력이 약해도 관료기구가 잘 움직이고 중간계층이 지지하면 통치력이 안전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경제·문화가 발전하고 통치력이 안정되어도 군사력이 우월한 외적을 만나면 통치력은 붕괴되고 만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통치력의 안전도는 어떠할까. 관료기구 주변에서 보자면 국무를 총괄하는 관료들의 수장인 국무총리 내정자가 초장부터 도덕성과 자질론에 휘말려 있고 50만 농민의 사활이 걸린 중국과의 마늘수입 협상안의 책임소재를 놓고는 전현직 고위관료들이 책임회피 공방전을 벌여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군대도 과거 군사정권 때와는 달리 통치권력의 안정에는 별반 기여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사회의 중간계층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민심은 지역에 따른 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현재의 권력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 야당 대통령 후보가 국민여론 조사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단적인 표현이다. 국외세력과의 관계를 놓고 보면 최근의 국제정세는 국권상실을 초래했던 19C말의 상황과는 크게 달라 군사력이 우월한 외국에 의해 나라가 붕괴될 우려는 없어 보인다.
이러한 통치력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경제·문화는 통치력과는 무관하기라도 한 듯 역동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월드컵을 통해 드러난 국민들의 자발적인 응집력 그리고 자신감과 관대함이 녹아있는 성숙한 관전 및 응원태도는 이 사회의 발전을 지탱하고 있는 힘의 근원이 일시적으로 표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 미국경제가 재채기만 해도 감기·몸살을 앓는다던 한국 경제는 미국 경제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활력을 잃지 않아 조만간 국제신용평가 기관의 국가 신용도도 상향조정될 것으로 예측된다. 통치권력이 이완되고 흔들린다고 해서 그 사회의 경제·문화·사상이 반드시 침체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동양 사상의 기본 틀을 만든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 백가 사상은 수많은 정치권력의 교체와 전란으로 인한 미증유의 혼란기에 태동하였다. 그 시대는 사상뿐 아니라 생산력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사상 생산력이 급증한 또 하나의 시대인 당말 오대 100년간도 정치 권력이 매우 불안정했던 극심한 혼란기였다.
그러나 정치권력의 안정이 사회발전에 결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정치권력이 건강하고 안정되면 사회 발전도 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 가정의 가장이 외도를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아 가정이 흔들릴 때 어머니와 자식들의 노력만으로도 가정을 바로 세울 수야 있지만 오죽 힘이 들겠는가. 국운 융성은 건강한 국민들의 발전적인 에너지를 정치 권력이 훼손하지 않을 때, 정치 권력이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도 국민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 때 더욱 융성해진다. 전임 대통령들 뿐 아니라 현직 대통령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는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들 앞에도 서지 못하는 이 참담한 권력현실은 월드컵 때 온 도로에 널부러져 있던 쓰레기를 줍던 손길들에 의해 조만간 청산될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이나 꿈꾸고 있는 지망생들은 냉정하게 반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얼굴에 어느 정도 두께의 철판을 깔아야 국민들 앞에 나설 수 있을까를. 철판의 두께가 두꺼운 권력자가 등장할수록 그 두께만큼 정칟경제·사회·문화는 왜곡되고 국운융성의 기운은 그 철판 아래서 신음 할 것이다. 누구나 잘못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주권자인 국민 앞에서 겸허하게 심판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이 제 얼굴에는 철판을 깔면서 남의 잘못 들추기에만 급급한 대통령후보 지망생들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신선한 권력의 등장은 이번 대선에서도 무망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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