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일전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차를 몰고 안개 낀 상당산성엘 올랐습니다. 주차장에서 남문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오솔길은 온통 운무(雲霧)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울창한 수목들은 전 날 내린 비에 흠씬 젖어 더욱 짙은 색을 보였고 숲에서는 아침인사를 나누는 새들의 지저귐이 새벽의 정적을 깼습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 천 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성채(城砦), 그 위에 꽂힌 붉은 깃발, 사방의 넓은 숲들, 그 풍경들은 한 폭의 아름다운 진경산수(眞景山水), 그대로였습니다.
인적 없는 안개 속을 헤치며 정상을 향해 홀로 오솔길을 올라가노라니 알 수 없는 신비감이 전율처럼 온몸에 전해져 왔습니다. 순간 그 옛날 중국에 있었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온 것은 아닌가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여느 날 같으면 멀리 청주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을 터인즉, 정상에 안개 자욱하니 눈앞의 숲말고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휘 몰아 도는 안개만이 이슬비가 되어 얼굴을 적셨습니다. 문득 헤르만 헤세의 단편 ‘가을의 도보여행’에 나오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안개 속을 방황하는 것은 신비롭도다 / 숲도 돌도 모두 쓸쓸해 보이고 / 아무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하니 / 우리는 모두가 혼자이로다 / 내 인생이 빛날 적에는 / 이 세상에 친구도 많았건만 / 지금 안개 내리니 / 아무도 볼 수 없도다 / 이 어둠을 모르는 자는 지혜로운 자가 아니로다 / 누구도 피 할 수 없이 조용히 / 만물에서 떠나게 하는 이 어둠을 / 안개 속을 방황하는 것은 신비롭도다 / 인생은 누구나 쓸쓸한 존재 / 아무도 남을 모르니 /우리는 모두가 혼자이로다-
안개는 정말 신비롭습니다. 안개 속에서 누가 누구를 볼 수 있으며 누가 남 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에 인생은 모두가 혼자이고 쓸쓸한 존재라고 시인은 노래했나봅니다.
이제 곧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뜨면 모든 것은 다시 원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수많은 산들도, 성곽도, 그리고 도시도 제 모습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다툼의 일상’을 계속 할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갖기 위해, 갖지 못한 자는 갖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할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사회가 영일(寧日)이 없을 만큼 정치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갈등을 빚고있는 것은 모두 권력과 재물과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집착과 탐욕 때문에 날마다 탄식하고 밤잠을 못 이루며 거짓을 일삼고 남을 속이며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부귀공명의 부질없음을 알지 못합니다.
안개 자욱한 새벽 산정에는 나무도 풀도 새도 모두 다투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발아래 물기 젖은 온갖 야생화들은 수줍은 모습으로 한낮의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새들은 이곳 저곳으로 날며 즐거이 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도시의 다툼도 거짓도 갈등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고려 말 국사(國師)였던 나옹화상은 이런 말을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남겼습니다.
‘허공은 날 더러 티 없이 살라하고, 청산은 날 더러 말 없이 살라하네. 욕심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 가라하네.’
안개 낀 새벽 상당산성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모두 잠든 이른 새벽 그곳에 한번 올라보면 어떨까합니다. 妄言多謝(망언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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