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은 삼태기같은 낙가산 골짝을 들어가서 한복판쯤에서 만났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는 용 세마리가 뒤엉켜 알을 품는 포란형(抱卵形)의 땅이라고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속의 바람과 속인(俗人)들의 발길까지도 막아 버릴 수 있는 은둔(隱遁)의 지세다. 그래서 지난번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이 백담사(白潭寺)로 갈 무렵 보살사도 그의 거처지 하나로 꼽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지난 2002년 2월 그런저런 인연이 닿아 뒤늦게나마 보살사를 다녀갔다.
그 기둥 이야기는 절의 역사가 깊고 오래 되었다는 것을 빗대어 일러 준다. 절을 처음 세운 창건(創建) 무렵의 기록은 없다. 다만 지난 1972년 경내 땅속에서 발견해서 극락보전으로 옮겨 모신 석조이존병립여래상(石造二尊竝立如來像․지방유형문화재 24호)과 석조지장보살좌상(石造地漿菩薩坐像)에서 어렴풋 역사를 찾을 수 있다. 그 불보살을 지은 솜씨를 빌려 시대가 8세기쯤으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비록 유물이었으나, 기록과 버금하는 고대 문화유산이 분명했다. 그래서 석조 불․보살상들은 극락보전의 주춧돌과 더불어 통일신라로 훌쩍 돌아가 보는 타임캡슐 같은 것이었다.
두 부처가 쌍둥이처럼 나란한 이존병립여래상은 릴리프 형식으로 돌에 돋을새김한 불교조각이다. 키가 짧다란 두 부처는 팔꿈치를 들고, 손을 가지런히 펴 보인 시무외인(施無畏人)의 손가짐을 했다. 오른쪽 부처는 오른손을, 왼쪽 부처는 왼손으로 손가짐을 했기 때문에 대칭을 이룬다. 그런 양식의 이존병립여래상은 제천 청풍(淸風)에서 나온 납석재불보살병립상 말고는 없다. 그래서 보살사가 자랑하는 불교조각이기도 했다.
오늘날 보살사가 기도도량(祈禱道場)으로 유명한 것은 석조지장보살좌상에 비롯한다. 불교경전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을 보면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끌어내 바로 세우는 중생구제(衆生救濟)를 애써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극락으로 가는 길이어서 많은 불자들이 지장기도에 매달린다고 한다.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修行)이 깊어서 아직 소년처럼 해맑은 얼굴을 한 세속 나이 여든의 주지스님은 보살사의 자랑 한가지를 더 들려주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보살사에 봉안되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했다.
지금까지 소문 난 경북 구미(龜尾) 도리사(桃李寺) 진신사리(10mm)와 견주어 3mm가 더 크다는 것이다. 1989년 극락보전 앞의 오층석탑을 손질할 때 나왔다. 첫 층의 몸뚱이에 범어로 새긴 '옴 마니 반메홈'이 보인다. 그리고 탑 2층 몸뚱이에는 청나라 연호 '강희계미(康熙癸未)'를 새겼다. 그 연호로 보아 5층석탑은 1703년에 지은 것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의 주검을 불태워 다비(茶毘)를 베풀때 나왔다는 진신사리는 지금 탑속에 들어가 있다.
보살사의 단 하나 밖에 없는 국가지정 보물이다. 보물 1258호인 이 불화는 가로 408cm,가로 600cm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의 걸개그림이다. 그림 아래쪽에 쓴 '숭정23년(崇禎二十三年)'이라는 글씨로 미루어 조선 인조 27년(1649년)에 그린 불화다.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불보살과 불법(佛法)을 받아 착한 사람이 된 교화성중(敎化聖衆), 사천왕 등이 모였다. 그리고 가운데 불단 아래서는 보살이 석가모니를 우러러 질문하는 그림을 그려 영산회도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삼베천을 캔버스로 삼아 그린 영산회도는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었으나, 어둡지 않다. 녹색, 황색, 주황색을 곁들여 화폭 전체가 오히려 밝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불화를 그린 이는 승려 신겸(申謙)이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 경북 김천 직지사(直指寺) 대웅전의 신중화(神衆畵)와 이웃 청원군 안심사(安心寺) 괘불(국보 297호)을 짓는 데도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