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사 보물을 보러 보살사에 가다. <황규호>

▲ 무심천변 용화사 전경 청주 용암동(龍岩洞)에 가면, 천지가 보살이다. 우선 천 년을 하고도 사백 년을 더 넘긴 오랜 절 보살사가 있다. 절을 품은 보타낙가산(普陀洛枷山)과 절이 들어앉은 마을 본디 이름 낙가동에도 보살이 자리한다는 뜻이 들었다. 보타낙가산은 흔히 관음보살이라 부르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늘 머문다는 인도 남쪽의 산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낙가동은 보타낙가산에서 유래했으니, 또한 보살과 무관치 않다. 그런 보살의 원력이 깃든 도량이어선가. 분별 없이 팽창한 도시가 낙가산 자락까지는 궁둥이를 붙이지 못했다. 삼태기 모양의 보타낙가산이 자락을 깔고 내려와 나지막하게 마무리한 쪽을 청주 동부우회도로가 아슬아슬 비켜 지나갔다.그 우회도로에서 일단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었다. 그들먹해있던 고층 아파트들이 이내 시야를 벗어났고, 도시와는 아주 담을 쌓은 듯 호젓한 시골길이 나온다. 그쯤이면 보살사로 가는 길을 묻지 않아도 좋다. 비스듬한 길가로 포도밭이 즐비하다. 큰길에서 보살사까지 요새 거리로 쳐서 2.9km라고 한다. 그리 멀지는 않았다. ▲ 청주시 용암동의 보살사. 절 뒷산에도 보살을 뜻하는 말이 들어있고, 절이 자리한 마을 이름에서도 보살이 보인다.
절은 삼태기같은 낙가산 골짝을 들어가서 한복판쯤에서 만났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는 용 세마리가 뒤엉켜 알을 품는 포란형(抱卵形)의 땅이라고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세속의 바람과 속인(俗人)들의 발길까지도 막아 버릴 수 있는 은둔(隱遁)의 지세다. 그래서 지난번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이 백담사(白潭寺)로 갈 무렵 보살사도 그의 거처지 하나로 꼽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지난 2002년 2월 그런저런 인연이 닿아 뒤늦게나마 보살사를 다녀갔다.

▲ 보살사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으뜸의 부처로 모신 전각이다. 보살사에는 가람(伽籃)이라야 모두 네 채가 있다. 절의 건물을 통틀어 말하는 가람이 ㄷ자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안의 절마당이 넓지 않다. 청주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학교를 다닐 적에 보살사에 한 번쯤은 소풍 왔을 것이다. 중학생은 초등학교 코흘리개 때 친구를 만나고, 고등학생은 벌써 울대가 튀어나온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나 의젓하게 손을 잡았던 절마당이다. 그렇듯 소풍날이 겹쳐 절마당을 가득 메웠던 학생들도 보이지 않는다. 소풍철이 훨씬 지났나보다. 그래서 낙가산 골짜기가 온통 적막강산(寂寞江山)으로 다가오고, 보살사 도량도 아주 조용했다. 도시를 지척에 두었으나, 보살사에 가면 지금도 산사의 낭만이 있다.절마당 저만치 언덕배기를 가로막아 선 가람의 하나가 대웅전 구실을 하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다. 맞배지붕을 한 조선시대 건물인데, 돌을 두 켜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지었다. 주춧돌은 돌생김새대로 그냥 썼거나, 둥글게 다듬어 쓴 것도 있다. 그 가운데는 경주 불국사(佛國寺)나 황룡사(皇龍寺)자리에 나오는 주춧돌을 닮은 것도 보인다. 보살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고찰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그렇듯 예스러운 주춧돌을 딛고 선 극락보전은 앞쪽으로 세 칸이고, 옆으로는 두 칸이다. 아담한 전각(殿閣)이다.지붕을 인 기와에는 중국 명나라의 연호를 새김글씨로 나타낸 '만력(萬曆)'과 산스크리트를 적는 데 썼던 인도의 예 글씨 범자(梵字)가 들었다. 만력은 1573년부터 시작한 연호이니까, 조선시대에 보살사를 고쳐지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절이 낡아 다시 손을 댔다는 것을 적은 보살사중수비(菩薩寺重修碑)에는 여러 차례 고쳐 지은 기록이 나온다.절집에는 교리를 바탕으로 한 법도(法度)가 있다. 극락보전에 으뜸으로 모신 부처를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은 까닭도 다 법도를 따른 것이다. 보살사 극락보전의 아미타불은 꽃부리가 활짝 피어 위로 올라간 연꽃 받침 앙련대좌(仰蓮臺座)에 앉았다. 먼저 오른발의 발바닥을 위로 하여 왼쪽 넓적다리에 얹고,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에 얹는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앉음새다. 어떤 일에 얽매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달관(達觀)의 자세가 아닌가. 그러니 부처의 얼굴 상호(相好)가 원만할 수 밖에 없다. 왼손은 무릎에 닿을 듯 말 듯 얹어 상장(上掌)했고, 오른손은 슬며시 펴서 든 아미타 본래의 손가짐을 했다. 이른바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이다. 몸에 걸친 큰 법의(法衣)자락이 부드러운 보살사 아미타불은 조선시대에 지은 나무부처 목조불(木造佛)이다. 그 좌우에는 아미타불을 가까이서 모시는 두 협시보살(挾侍菩薩) 관세음과 대세지(大勢至)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아미타불은 자그마치 열 겁(劫)전에 깨달음을 이루고, 지금도 서방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는 부처라고 한다. 천지가 한 번 개벽(開闢)을 하고 나서 다음 개벽이 이루어질 때까지가 한 겁이다. 현대과학이 밝힌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이고 보면, 아미타불의 시대를 거슬러 계산할 재간이 없다. 그런 엄청난 산술에서 통이 큰 불교가 보인다. 오랜 절에는 의레절집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좀 허풍스럽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데가 있다.요즘의 화장실을 가리키는 해우소(解憂所)이야기는 배꼽을 쥘 만큼 사람들을 웃긴다. 해후소가 하도 높아서 아침에 변을 보면, 저녁나절에 가서야 바닥에 똥 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이야기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보살사에는 극락보전의 기둥을 주제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극락보전을 앞에서 보았을 때 왼쪽 벽의 첫 번째 기둥은 느티나무, 두 번째는 싸리나무, 세 번째는 칡나무, 네 번째는 박달나무라는 것이다. 싸리나무라면, 회초리나 싸리비를 연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싸리나무 기둥으로 세웠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하기야 보살사 터를 일찍 관세음보살이 와서 손수 잡아 주었다니, 싸리나무 기둥쯤이야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 석조이존병립여래상. 두 부처가 쌍둥이처럼 나란한 이존병립여래상은 릴리프 형식으로 돋을새김한 불교 조각이다.
그 기둥 이야기는 절의 역사가 깊고 오래 되었다는 것을 빗대어 일러 준다. 절을 처음 세운 창건(創建) 무렵의 기록은 없다. 다만 지난 1972년 경내 땅속에서 발견해서 극락보전으로 옮겨 모신 석조이존병립여래상(石造二尊竝立如來像․지방유형문화재 24호)과 석조지장보살좌상(石造地漿菩薩坐像)에서 어렴풋 역사를 찾을 수 있다. 그 불보살을 지은 솜씨를 빌려 시대가 8세기쯤으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비록 유물이었으나, 기록과 버금하는 고대 문화유산이 분명했다. 그래서 석조 불․보살상들은 극락보전의 주춧돌과 더불어 통일신라로 훌쩍 돌아가 보는 타임캡슐 같은 것이었다.

두 부처가 쌍둥이처럼 나란한 이존병립여래상은 릴리프 형식으로 돌에 돋을새김한 불교조각이다. 키가 짧다란 두 부처는 팔꿈치를 들고, 손을 가지런히 펴 보인 시무외인(施無畏人)의 손가짐을 했다. 오른쪽 부처는 오른손을, 왼쪽 부처는 왼손으로 손가짐을 했기 때문에 대칭을 이룬다. 그런 양식의 이존병립여래상은 제천 청풍(淸風)에서 나온 납석재불보살병립상 말고는 없다. 그래서 보살사가 자랑하는 불교조각이기도 했다.

오늘날 보살사가 기도도량(祈禱道場)으로 유명한 것은 석조지장보살좌상에 비롯한다. 불교경전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을 보면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끌어내 바로 세우는 중생구제(衆生救濟)를 애써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극락으로 가는 길이어서 많은 불자들이 지장기도에 매달린다고 한다.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修行)이 깊어서 아직 소년처럼 해맑은 얼굴을 한 세속 나이 여든의 주지스님은 보살사의 자랑 한가지를 더 들려주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보살사에 봉안되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했다.

지금까지 소문 난 경북 구미(龜尾) 도리사(桃李寺) 진신사리(10mm)와 견주어 3mm가 더 크다는 것이다. 1989년 극락보전 앞의 오층석탑을 손질할 때 나왔다. 첫 층의 몸뚱이에 범어로 새긴 '옴 마니 반메홈'이 보인다. 그리고 탑 2층 몸뚱이에는 청나라 연호 '강희계미(康熙癸未)'를 새겼다. 그 연호로 보아 5층석탑은 1703년에 지은 것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의 주검을 불태워 다비(茶毘)를 베풀때 나왔다는 진신사리는 지금 탑속에 들어가 있다.

▲ 보살사의 오층석탑. 1703년에 지은 이탑속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 보살사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삼존후불탱화(阿彌陀三尊後佛幀畵)와 극락회탱(極樂繪幀) 등 두점의 불화가 걸렸다. 탱화는 불ㆍ보살의 초상이나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불교회화다. 아미타삼존후불탱화 아래는 먹으로 쓴 '건융24년 기묘3월(乾隆二十四年己卯三月)'이라는 글씨가 들어 1759년에 그린 불화임을 알 수 있다. 극락탱화는 그보다 늦은 대한제국 고종 때인 1902년 청주군수 이희복(李熙福)이 용화사(龍華寺)에 봉안했다고 적었다. 용화사에서 보살사로 나앉은 연유는 알길이 없다.그렇듯 보살사 불교미술의 새김글씨나 붓글씨 따위의 명문(銘文)에 나타난 시기는 모두가 늦은 조선시대다. 그래서 얼마전에 개인 소장가가 학계에 공개한 '청주목관(淸州牧官)'의 이두문서(吏讀文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정9년10월 일(至正九年十月 日)'에 작성한 문서다. 그 문서에 적은 원나라 연호는 1349년인데, 원나라 출신의 고려 덕령공주(德寧公主)가 청주목관에게 내려보낸 것이다. 청주목의 응천사(鷹天寺)와 화림사(花林寺)로 하여금 땅을 떼어 보살사에 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보살사가 공주의 남편이었던 충혜왕의 명복을 빌어주는 절이기 때문에 제사비용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중세(中世)말엽 보살사의 위상을 가늠하는 기록문서가 아닌가 한다. 어떻든 보살사는 왕실 실력자를 후원자로 두었던 셈이다. 고려시대에 두 임금이 보살사를 들렀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전해오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두 임금은 바로 태조와 공민왕이어서 그 가능성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뒤 630년 서원경(西原京)을 다른 지역에 앞서 맨 먼저 순행(巡行)했다는 기록과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난을 피했다가 청주에 들러 행궁(行宮)을 차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참으로 유서 깊은 절이다. 보살사에 오면서 꼭 마음 먹었던 큰 볼일 하나를 끝내 빠뜨린 것이 사뭇 섭섭했다. 극락보전 뒤쪽 나무상자에 깊이 묻어 두었다는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을 못 보고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괘불탱은 절집의 걸개그림이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할 때의 모임을 스펙터클하게 그린 괘불탱 속의 영산회도(靈山會圖)는 불교회화의 꽃이기도 하다. 초파일날 같은 큰 법회가 아니고는 바깥에 내걸 수 없는 대작불사(大作佛事)의 성보(聖寶)여서 나그네도 섭섭한 마음을 애써 접었다.전날 시내에서 속인들에게 약속을 미리 해두었던 터라, 떠날 채비를 했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떠난다는 불가의 말처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시간이 다 되었는 데, 점심공양이나 들고 가란다. 굳이 사양을 했더니, 절집 먹새일을 맡은 공양주(供養主) 보살이 산딸기 복분자(覆盆子) 한 보시기를 요사채 마루로 내왔다. 산딸기는 시절도 무상하게 벌써 빨갛게 익었다. 입맛이나 다시라는 공양주 아주머니가 보살마냥 후덕하다. 단맛과 신맛이 어우러져 혀끝에서 터지는 산딸기를 한 줌이나 덜어 먹고, 왁자지껄한 세속의 도시로 나오는 길을 휘적휘적 걸었다. 영산회도를 보지 못한채 귀로를 재촉하는 발길이 가벼울 리 없지만, 다음을 기약할 밖에 별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데 명년 초파일은 아직 멀다. <황규호> *영산회괘불탱
보살사의 단 하나 밖에 없는 국가지정 보물이다. 보물 1258호인 이 불화는 가로 408cm,가로 600cm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의 걸개그림이다. 그림 아래쪽에 쓴 '숭정23년(崇禎二十三年)'이라는 글씨로 미루어 조선 인조 27년(1649년)에 그린 불화다.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불보살과 불법(佛法)을 받아 착한 사람이 된 교화성중(敎化聖衆), 사천왕 등이 모였다. 그리고 가운데 불단 아래서는 보살이 석가모니를 우러러 질문하는 그림을 그려 영산회도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삼베천을 캔버스로 삼아 그린 영산회도는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었으나, 어둡지 않다. 녹색, 황색, 주황색을 곁들여 화폭 전체가 오히려 밝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불화를 그린 이는 승려 신겸(申謙)이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 경북 김천 직지사(直指寺) 대웅전의 신중화(神衆畵)와 이웃 청원군 안심사(安心寺) 괘불(국보 297호)을 짓는 데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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