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史庫)와 관아가 있던 충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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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史庫)와 관아가 있던 충주읍성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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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권<3> - 충주시<2>

▲ 조선시대 충주읍성도. 읍성은 거주주체가 왕이 아니고 군·현 주민의 보호와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이다. 우리나라 군·현들이 배후에 진산을 두고 시가지를 형성하였으므로 독특한 읍성의 형식이 발달되었다. 읍성은 평산성의 형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평지에 축조된 평지성도 많이 있다. 읍성의 평면 형태는 반듯하게 네모로 된 방형과 원형·자연지세형 등이 있는데 각 방향의 중심부에 성문을 두었다. 성문은 문루를 세워 위엄을 갖추고 성벽에는 요소요소에 부속시설을 갖추었다. 여장을 비롯하여 칟포사를 배치하였고 대부분의 읍성은 성벽외부에 자연 또는 인공 해자를 축조했다. 평지를 위주로 한 읍성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두었고 성안에는 중앙의 북편에 관아를 두고 일부 주민들을 수용하여 행정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도로는 문루에 이르는 열십자형으로 조성하고 성내에 우물이나 연못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충주에 성이 있는갗라고 물으니 유성룡이 ‘성이 비록 있기는 하나 토적도 방어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충주읍성은 매우 퇴락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충주읍성이 다시 개축을 하게 된 것은 말기인 고종 3년(1866) 10월 병인양요를 겪은 뒤 전국의 성첩과 국기를 보수하고 대오와 군저를 확보한 포수를 배치하여 유사시를 대비하라는 왕의 조칙을 받고 충주목사 조병로가 고종 6년(1869) 2월에 개축하여 10개월에 걸쳐 준공하였다. 하지만 1896년 정월 동학농민전쟁으로 성문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동헌으로 쓰이던 청녕헌과 최근까지 중원군청의 관사로 사용되었던 제금당이 남아 있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1,200m, 성벽의 두께가 약 7m, 높이가 약 6m로 석축으로 축성되었다. 그리고 2층 누각으로 되어있는 동서남북의 4대문과 야문(夜門)과 수구문으로 되어 있고 각 성문마다 수문청(수문장이 일을 보던 곳)이 따로 있었다. ▲ 충주읍성 관아공원.

옛날의 동문은 조양문이라 하여 2층으로 성내동 옛 법원 쪽에 있었고, 서문은 휘금문이라 하여 역시 2층으로 성내동 중앙여관 북쪽길에 있었으며, 남문은 봉이문이라 하여 2층으로 성내동 아시아극장 위편길에, 북문은 경천문이라 하여 성내동 보문당 동쪽편 도로에 있었다. 북문은 목사나 원이 부임하여 오거나 서울로 올라갈 때에는, 장호원 방면에서 앙성면 용포리를 거쳐 가금면 가흥리에서 금가면 하담리를 지나 충주시 목행동의 남한강을 건너 충주시로 들어오는 통로였으므로 다른 문에 비해 배나 컸다고 한다.

야문이란 밤11에 4대문이 닫히므로 그 이후에는 이 문을 사용하도록 설치했다고 하며, 성내동 옛 충주 경찰서장 관사 북쪽 도로에 있었다. 수구문은 성안의 물을 빼는 배수문으로 중원군 농업협동조합이 있는 곳에 있었다. 이 성을 중심으로 남쪽을 성남동, 서쪽을 성서동, 성 안을 성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성을 다시 쌓은 기념으로 충주목사 조병로가 세운 비석이 지금 관아공원내에 약 1.8m 크기로 남아 있다. 또, 조병로 목사의 공덕비가 달천다리 옆과 가금면 가흥리 삼거리에 있다. 1978년 9월 2일 이 지역 문화재 애호인들의 모임인 예성동호회가 성남동 개인집터에서 연화문이 조각된 성돌을 찾았다. 그후 예성심방석이라고 명명된 이 성돌에는 화려한 연화문은 물론 자방 안에 태극모양까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 예성동호회가 찾아내어 ‘예성심방석’이라 명명된 성돌에는 화려한 연화문과 태극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성돌에 의하여 충주가 예성이라는 아름다운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심방석은 현재 충주박물관에 이전, 보관되고 있다. 충주읍성 안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축성사적비가 있다. 이 비는 고종 6년(1869)에 충주성을 쌓고 기념하기 위하여 충주목사 조병로가 동헌 앞에 세운 비이다. 이 비에는 충주읍성의 크기와 문루의 크기가 명기되어 있고 축성과 관계된 사람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좌수 조광수 외 65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충주읍성이 다른 지역의 읍성보다도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충주의 개천사에 보관한 바 있는데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태종 때부터 충주사고를 두어 역대의 실록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충주읍성은 충주사고를 수호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 사고 :

나라에서 열성의 실록과 중요한 책을 보관하여 두던 곳집. 고려 때부터 두었고, 조선 태조 때는 춘추관과 충주에 두었고, 그 뒤 1439(세종21)년 성주와 전주에 두어 네 곳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타버려 1606(선조39)년에 다시 강화 마니산·무주 적상상·봉화 태백산·강릉 오대산에 두었다.

2. 청녕헌 :
충주시 성내동 154 중앙공원 내에 있으며 관아의 동헌으로 쓰던 건물로 조병로 목사가 1870년(고종 7년) 10월에 중건하였다. 전면 7칸·측면 3칸의 목조와가 팔작지붕으로 장중한 한국의 건축미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지방문화재 제66호이다.

3. 제금당 :
충주시 성내동 154 중앙공원 내에 있으며 관아의 안채로 쓰였던 건물로 정면 6칸 반·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귀빈을 맞이하던 영빈관으로 지방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병로 목사가 중건하였으며 제금당이란 당호로 미루어 보아 백성들에게 길쌈을 장려하는 뜻이 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예성동호회 :
충주지방의 향토사연구단체. 중원고구려비를 처음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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