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애씨(81) 부부, 전쟁발발 직후 청주경찰서로 끌려가
남일면 쌍수리 학살현장서 총탄 8발 맞고 생존

한국전쟁 당시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기록된 것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이다. 도내에서는 영동 노근리와 단양 곡계굴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극도 벌어졌지만 전쟁초기 군경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있다.

지난 2002년 결성된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상임대표 곽동철 정진동 곽태영)는 도내 피해사례를 수집하고 피해자 및 유가족 실패를 파악해 220쪽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보고서 내용 가운데 눈길을 끈 대목은 학살 현장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난 생존자 증언과 현장 목격자의 목격담이었다.

지난 94년 6월 월간 <충청리뷰> 특집기사를 시작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집중조명해 온 본보는 도내 10여개 학살현장 취재를 통해 6~7명의 생존자와 목격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남일-미원-내북간 국도변의 청주지역 보도연맹원 학살현장에서는 생존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2003년 뜻밖에(?) 남일면 학살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의 가족이 충북진상규명대책위에 전화를 걸어왔다. 청주시 우암동에 사는 정순옥씨(60)는 자신의 부모가 50년 7월초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남일면 쌍수리로 끌려가 군인의 총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수십명의 연행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절명하고 어머니는 총알 8발을 맞고도 마을 이장의 눈에 띄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본보 취재진은 이후 진상규명대책위를 통해 정순옥씨 어머니를 인터뷰하려 했지만 “남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완강한 뜻에 따라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5월 과거사법 국회통과와 함께 다시한번 정씨에게 어머니를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마침내 지난 27일 취재진은 청주지역에서 유일한 현장 생존자인 강영애씨(81)를 만날 수 있었다. 강씨의 증언을 토대로 55년전, 그 부끄러운 전쟁역사의 현장을 되짚어 본다. 1950년 7월초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30여호 주민들은 난데없는 전쟁발발 소식에 뒤숭숭하기만 했다. 나이 16살에 남일면 가산리 정세영씨에게 시집온 강씨는 전쟁당시 5살바기 딸을 키우고 있었고 뱃속에서 임신 7개월의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농사일 밖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25살 나이의 전형적인 시골 새댁이었다. 하지만 양력 7월초순 어느날의 이른 새벽, 경찰관 몇 명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우물가에서 보리쌀을 씻고 있던 강씨를 낚아챈 경찰은 집안에 있던 남편 정씨까지 불러내 청주시내 경찰서로 곧장 연행했다. 가산리에서는 강씨 부부를 포함해 7명이 끌려왔고 경찰관들의 입에서 ‘보도연맹’ ‘빨갱이’이란 말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6 25나기 전에 우리 동네에 일본에서 대학나온 유식한 분이 있었어. 나중에 동네사람들이 우리 동네 망친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농민연맹에 가입도장 찍어준 사람이 많다는 겨. 우리는 (남편이)도장을 찍어줬는지 뭐했는지도 몰라, 경찰서에 교육받으러 간 적도 없구, 그냥 경찰들이 와서 끌고가니까 따라 간겨” 청주경찰서로 끌려간 강씨는 50여명의 여성들과 함께 한 방에 갇히게 됐다. 경찰은 연행자를 한 사람씩 불러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좌익전력에 대한 추궁과 보도연맹 교육실적 등을 캐묻는 내용이었다. 앞뒤 영문조차 모르고 끌려간 강씨는 무조건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조사관들은 뭉둥이 뜸질에서 전기고문까지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의자에 묶어놓고 양쪽 손에 전선을 대고, 어떻게 하면 온몸이 꽉 쪼그라들면서 그냥 자지러지는 겨. 난 보도연맹이 뭔 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뭘 어떻게 얘기하라는 건 지 알 수가 있어야지”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수감된 강씨는 하루 세끼 주먹밥을 받아먹으며 몰려오는 피로감으로 잠만 청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몸도 무겁고 잠도 부족하니까, 그저 틈만나면 사람들 없는 똥깐쪽에서 잠만 잔겨. 나중에 어떤 이가 ‘젊은 사람이 이 난리통에 그렇게 잠이 오느냐’고 얘기할 정도였어” 비좁은 경찰서 감방에서 2주일만에 풀려난 강씨 등은 포승줄로 묶인채 곧장 군용트럭에 실렸다. 다행히 강씨는 남편 정씨를 만나 같은 트럭에 올랐고 결국 이들이 도착한 곳은 자신의 고향마을과 불과 3km 떨어진 청원 남일면 쌍수리 국도변 야산이었다. 4~5대의 트럭이 도착했고 이미 무장한 군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개미’처럼 깔려있는데, 트럭에서 내리니까 전부 한군데 모아놓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한참 시켰어. 남편이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이젠 죽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그러더라고, “이렇게 우리 같이 죽게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여. 그러구나서 총소리가 막 나더니, 난 정신도 못차리고 그냥 엎어져 있었어”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속에서 강씨는 무려 8발의 총알을 맞았다. 얼굴, 등, 팔, 어깨, 엉덩이에 맞은 총탄은 용케 치명적인 부위를 벗어나 강씨의 생명줄을 놓치지 않게 했다. 하지만 왼쪽 턱밑에서 오른쪽 뺨으로 관통한 총탄 때문에 한쪽 씹는 이를 모두 잃고 안면부 기형이라는 여성으로 감당하기 힘든 천형(天刑)을 지게 됐다. ▲ 시부모의 입단속 때문에 평생 억울함을 하소연조차 못했던 강영애 할머니(81) 등쪽에 맞은 총탄은 요행히 척추를 비켜나갔고 태아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격이 끝나고 차출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시신을 흙으로 덮는 작업을 시작했다. 가물가물한 의식상태에서 강씨는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흙을 쓸어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두런두런 사람들 말속에서 “어디 사는 누군데, 이런 험한 꼴을 당했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강씨는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정세영씨가 남편’이라고 얘기하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이쿠 이게 무슨 변고여, 엊그제도 우리 아들하고 같이 있다 갔는데”라며 깜짝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쌍수리 이장이었고 마침 숨진 남편과 그 아들이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던 것. 이장은 주민들에게 강씨의 신원을 설명하고 인근 콩밭으로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보호조치했다. 학살현장이 자신의 마을 근방 인지도 몰랐던 강씨는 천우신조로 지인을 만나 목숨을 보전하게 된 것. 이날 밤 쌍수리 이장의 전갈을 받은 시아버지가 찾아와 숨진 아들을 임시방편으로 땅에 묻고 반죽음이 된 며느리를 등지게에 태운채 남몰래 밤길을 달려갔다.

“우리 시아버지가 그날 등가죽이 벗겨졌었어, 남편 일찍 떠나고 난 몸이 망가지고…, 시부모님들이 손녀딸 키워주고 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 하지만 남편 죽은 얘기, 경찰서 끌려간 얘기는 절대 남들한테 하지 말라구 다짐하셨기 때문에, 두분 돌아가실 때까지 6·25때 얘기는 아무 한테도 못했어”

총상을 입고 집안에 숨어 자가치료를 하던 강씨는 2개월만에 친인척의 도움으로 청주상고에 임시설치된 북한 인민군 야전병원에서 정식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임신부였던 강씨는 어렵사리 유복자까지 출산했으나 불과 3개월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총탄 8발을 맞은 강씨의 몸에서 건강한 신생아를 기대하기도 무리였고 출산직후 가족들이 피난길에 올라 갓난아기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것도 원인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삽시간에 남편과 아기까지 잃은 강씨가 그날 그 기억을 55년간 거부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권혁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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