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 정립한 애국혼의 상징 <황규호>

 청주에서 낭성 귀래리(歸來里) 고드미까지는 자동차로 달려 30여분이 걸린다. 옛날에는 청주군에 들어갔으나, 지금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다.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1880~1936년)가 아주 돌아와서 잠든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은 아늑했고, 단재의 묘소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들었다.

그가 숨을 거두었던 1936년 2월의 만주(滿洲)벌판은 아직 겨울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여순(旅順)땅 옥사(獄舍)바닥은 얼음장마냥 차가왔을 것이다. 한겨울 삭풍이 맨 먼저 불어대는 블라디보스토크 동토에서도 여러 해를 춥고 외롭게 살았으니, 유택(幽宅)이라도 따뜻해야지…. 그토록 따사로운 햇살 때문이었을까. 영각(影閣)에서 만난 그의 초상(肖像)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걸터앉은 자세의 전신교의상(全身交椅像)얼굴에는 올곧은 선각자의 기개가 역력하게 어렸다.

▲ 단재 영당에 있는 단재전신교의상. 올곧은 선각자의 기개가 역력하다. 그의 고향 귀래리의 '귀래'는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 말은 단재의 생애에 맞추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어떻든 선각자 단재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고향 귀래리로 돌아왔다. 성균관(成均館)시절과 신문에 글을 쓰는 논객(論客)으로 국내에서 이름을 날릴 무렵에도 고향을 더러 찾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눌러 머무른 좌정(坐定)의 시기로 보아서는 대강 세 차례로 나눌 수 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첫 귀래는 1887년에 이루어졌다.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於南里)도리미 진외가(陣外家)를 떠나온 여덟 살 때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98년 성균관에 들어간 단재는 독립협회(獨立協會)와도 보통이 넘는 인연을 맺었다. 그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이 되었지만, 이내 풀려났다.그 두 번째 귀래는 19세기가 다 저문 1899년에 이루어졌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가덕면 인차리(仁次里)에 세운 문동학원(文東學院)강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1905년에는 성균관 박사가 되었지만, 미련도 없이 버렸다. 그 때 단재가 문중 사람들과 더불어 낭성면 관정리(官井里)에 세운 산동학당(山東學堂)의 교명만큼은 뒷날 산동초등학교로 이어졌다. 그러나 농촌인구가 줄어들면서 학생수가 모자라 지금은 그나마 없어지고 말았다. 당시 교육내용을 속속들이 알길은 없다. 하지만 시대사조(時代思潮)에 뿌리를 둔 애국교육을 주요 커리큐럼으로 삼았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할 수 있다.산동학당 운영은 앞서 참여했던 문동학원과 더불어 단재가 고향을 향한 마지막 봉사였고, 두 번째 귀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교육사업에 뛰어든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지로부터 단재를 상하이(上海)로 불러들인 무관출신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1879~1922년)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신백우(申佰雨․1888~1962년)다. 그들은 개화ㆍ개혁의 문중혁명(門中革命)을 따랐던 고령신씨(高靈申氏)일가*의 엘리뜨들이기도 했다. ▲ 청원 낭성면 귀래리의 단재영각. 영각뒤에 자리한 그의 묘소에는 햇살이 가득 들었다.
단재가 고향 귀래리로 돌아온 세 번째 마지막 귀래는 살아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6년 2월 21일 차가운 여순감옥에서 불귀객(不歸客)이 되었기 때문에 고향 땅을 발로 밟지도 못한 채 한 줌의 재로 귀래했던 것이다. 그의 주검은 2월 24일 여순에서 화장되었다. 그래서 유해는 그 보다 늦게 고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던 그 생전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못했다. 후손을 위해 무덤을 쓰자는 문중과 지인들의 뜻이 너무 거세었던 터라, 유해를 귀래리에 묻기로 했던 것이다. 일제는 유해를 묻는 일마저 방해하고 나섰다. 그래서 가족과 일가들은 단재의 집터에 몰래 묻어야 했다.

그 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마련한 돌에 위창(葦瘡) 오세창(吳世昌)이 묘명(墓銘)을 쓴 무덤빗돌도 신백우가 몰래 가져다 세웠다. 무덤을 쓰게 눈감아 준 낭성면장에게는 일제의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애만큼이나 평탄치 못했다.

▲ 단재 묘소를 참배하는 학생들. 그를 추모하는 행렬은 늘 끊이지 않고 있다. 그의 생애는 1910년 망명(亡命)을 분기점으로 갈라졌다. 망명 이전이 전기(前期)였다면, 그 이후 망명생활은 후기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애 가운데 전기에 해당하는 1906년은 아주 중요한 해였다.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사설(社說)로 유명한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논설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언론의 길이 단재를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또 사학자로 내몰았는 지도 모른다. 어떻든 생애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장지연의 사설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양기택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로 자리를 옮겨 주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그의 『대한매일신보』시절은 논설과 시론(時論), 사론(史論)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필명이 정점을 이룬 시기였다. 애국심을 바탕으로 강한 힘을 스스로 길러야 한다는 그의 자강의식(自强意識)과 일제의 침략에 맞선 저항의식은 논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고청년(警告靑年)', '한국내 일인(韓國內 日人)', '일경지폭(日警之暴)', '일진회(一進會)', '한병해산(韓兵解散)', '고지식한 대한 동포여', '한국차관(韓國借款)'등은 그가 쓴 『대한매일신보』 시절의 논설이다. 일제 식민지 전야(前夜)의 당시 사회는 패배감에 사로잡힌 절망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단재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면, 그 힘을 영웅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웅전(英雄傳)을 썼다. 그것도 대외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을지문덕(乙支文德), 최영(崔塋), 이순신(李舜臣)같은 영웅들이었다. 그 무렵에 기틀을 다진 이른바'단재사학(丹齋史學)'의 민족중심 역사관은 논문 『독사신론 讀史新論』으로 나타났다.그는 나라가 부끄럽게도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기는 1910년 8월 29일을 얼마 남겨두고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했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매국노들의 배신을 규탄하는 『대한매일신보』사설 '한일 합병론자에게 고함'은 그의 고별논설이 되었다. 신민회(新民會)의 망명계획에 따라 도산(島山)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망명길에 오른 단재는 도중에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들렀다. 그 때 단재를 처음 만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회고에 따르면, 검은 무명두루마기에 미투리를 신은 차림새를 한 단재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은 눈이었다고 한다. 그의 망명 보따리 속에는 『동사강목(東史綱目)』* 한벌이 들어있었다. 망명을 재촉하는 와중에 오산학교를 방문하고, 역사책 『동사강목』을 달랑 짐속에 꾸렸다는 사실은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평생을 두고 열정을 불사른 구국교육운동과 민족주의 역사연구, 언론을 통한 애국계도운동과 무관치않은 단재의 이상(理想)이었던 것이다.그의 망명생활은 1910년 4월 7일께 압록강을 건너 단둥(丹東)에서 칭다오(靑鳥)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비밀결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했다. 그리고 교민들로 하여금 항일독립사상과 산업진흥을 부추기는 『권업신문 勸業新聞』이 창간되자 주필을 맡았다. 거기서 병을 얻는 단재는 신규식이 보내 준 여비를 가지고 상하이로 가서 동재사(同齎社)활동에 참여했다. 1914년 대종교(大悰敎)초청으로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들어가 한 해 남짓 머물면서 일대 흩어진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돌아보았다. 그때 고대사 무대의 답사는 그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모양이다. 오죽 감동을 했으면 "인생을 기념할 만한 장관이었고, 그 웅장한 규모를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 보다 낫다"고 판단했겠는가. 그리하여 단재의 역사관을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물들기 이전의 역사, 다시 말하면 한족(漢族)과 싸워 이겼던 시대의 고대사에서 민족의 기상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1915년 베이징으로 간 그는 다음해 ꡐ한놈ꡑ이라는 민족의식이 뚜렷한 주인공을 내세워 애국정신을 밀도 짙게 표현한 소설 『꿈하늘(夢天)』을 탈고했다. 『꿈하늘』은 후기에 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과 더불어 그의 대표적 문학작품으로 꼽힌다.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단재는 임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법통(法統)문제를 둘러싼 이승만(李承晩)과의 대립은 그를 끝내 반임정노선(反臨政路線)에 서게했다. 그가 뒷날 의열단(義烈團)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과 다물단(多物團)선언을 쓰는 등 항일 테러단체에 관여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말로만의 애국을 내세우기 보다는 힘으로 일제를 밀어부치는 민중혁명의 독립운동같은 실천적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 2002년 단재영당 오른쪽에 건립된 기념관
그는 일제와 무력투쟁을 벌이는 데 쓸 자금 마련을 위해 외국위체(外國爲替)를 입수하고, 또 돈을 바꾸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른바 '외국위체사건'인 데, 그 사건은 단재를 여순감옥에 가둔 빌미가 되었다. 그는 아나키즘에 기울기도 했지만,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계속 버리지 않았다.

1925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나 국내 신문에 연재한 숱한 사론은 단재를 오늘날까지도 우뚝한 사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향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에서 실천한 그의 구국교육운동은 망명지에서까지 계속되었다. 상하이의 박달학원(搏達學阮)과 의영학교(儀寧學校), 만주의 동창학교(東昌學校)등이 그것이다.

어떻든 단재는 역사가이자 교육자, 비타협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가로 영원히 추앙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단재영각에는 어느 대학 사학과 학생들의 참배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영각 앞 두 그루 감나무에는 그가 망명지에서 한 입 듬뿍 물어 삼키고 싶어 했을 지도 모를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최근 새로 문을 연 단재기념관이 아담한 데, 그가 베이징에서 창간한 한문잡지 『천고(天鼓)』와 똑같은 시제로 지은 돌시비가 그 앞뜰에 섰다. 단재의 절규처럼 들리는 시어가 하도 처절하여 옷깃을 여몄다. <황규호>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소리를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 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노라     

*청주 고령신씨
그 신씨 문중혁명은 1890년대에 이미 개화에 눈을 돌려 젊은이들에게 신교육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신태휴(申泰休)등 몇몇 문중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영천학계(靈川學契)를 만들고, 서울에 거처까지 마련하여 신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단체와 연구단체를 이끈 선각의 인재들이 문중에서 배출되었고, 독립운동가와 언론인 등 기라성같은 개와인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신식교육을 받아 한말 엘리트 관리로 등용된 이도 14명에 이르는 등 당시 전국에서 그만한 개화문중이 없었다는 것이다.

*동사강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輻․1712~1791년)이 지은 우리나라 역사책이다. 논편 17권, 부록 3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왕권신장에 목적을 두었던 기존의 사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외기(外紀)로 떼어 낸 『동국통감』의 잘못을 바로 잡았고, 권력을 휘두른 역사의 인물을 깎아내린 반면 애국명장들은 높이 치켜세웠다. 역사 줄거리 전체에 애국․애민의 사상이 넘치는 가운데 역사가는 의리를 밝혀야 한다는 역사서술 원칙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역사는 강역(彊域)중심의 지리를 전제로 한다는 새로운 발상은 '삼국초기도(三國初起圖)' 같은 여러 지도로 표시되었다. 신채호가 이 책을 역사연구의 자료로 삼은 까닭도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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