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서 낭성 귀래리(歸來里) 고드미까지는 자동차로 달려 30여분이 걸린다. 옛날에는 청주군에 들어갔으나, 지금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다.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1880~1936년)가 아주 돌아와서 잠든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은 아늑했고, 단재의 묘소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들었다.
그가 숨을 거두었던 1936년 2월의 만주(滿洲)벌판은 아직 겨울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여순(旅順)땅 옥사(獄舍)바닥은 얼음장마냥 차가왔을 것이다. 한겨울 삭풍이 맨 먼저 불어대는 블라디보스토크 동토에서도 여러 해를 춥고 외롭게 살았으니, 유택(幽宅)이라도 따뜻해야지…. 그토록 따사로운 햇살 때문이었을까. 영각(影閣)에서 만난 그의 초상(肖像)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걸터앉은 자세의 전신교의상(全身交椅像)얼굴에는 올곧은 선각자의 기개가 역력하게 어렸다.
단재가 고향 귀래리로 돌아온 세 번째 마지막 귀래는 살아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6년 2월 21일 차가운 여순감옥에서 불귀객(不歸客)이 되었기 때문에 고향 땅을 발로 밟지도 못한 채 한 줌의 재로 귀래했던 것이다. 그의 주검은 2월 24일 여순에서 화장되었다. 그래서 유해는 그 보다 늦게 고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던 그 생전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못했다. 후손을 위해 무덤을 쓰자는 문중과 지인들의 뜻이 너무 거세었던 터라, 유해를 귀래리에 묻기로 했던 것이다. 일제는 유해를 묻는 일마저 방해하고 나섰다. 그래서 가족과 일가들은 단재의 집터에 몰래 묻어야 했다.
그 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마련한 돌에 위창(葦瘡) 오세창(吳世昌)이 묘명(墓銘)을 쓴 무덤빗돌도 신백우가 몰래 가져다 세웠다. 무덤을 쓰게 눈감아 준 낭성면장에게는 일제의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애만큼이나 평탄치 못했다.
그는 일제와 무력투쟁을 벌이는 데 쓸 자금 마련을 위해 외국위체(外國爲替)를 입수하고, 또 돈을 바꾸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른바 '외국위체사건'인 데, 그 사건은 단재를 여순감옥에 가둔 빌미가 되었다. 그는 아나키즘에 기울기도 했지만,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계속 버리지 않았다.
1925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나 국내 신문에 연재한 숱한 사론은 단재를 오늘날까지도 우뚝한 사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향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에서 실천한 그의 구국교육운동은 망명지에서까지 계속되었다. 상하이의 박달학원(搏達學阮)과 의영학교(儀寧學校), 만주의 동창학교(東昌學校)등이 그것이다.
어떻든 단재는 역사가이자 교육자, 비타협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가로 영원히 추앙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단재영각에는 어느 대학 사학과 학생들의 참배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영각 앞 두 그루 감나무에는 그가 망명지에서 한 입 듬뿍 물어 삼키고 싶어 했을 지도 모를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최근 새로 문을 연 단재기념관이 아담한 데, 그가 베이징에서 창간한 한문잡지 『천고(天鼓)』와 똑같은 시제로 지은 돌시비가 그 앞뜰에 섰다. 단재의 절규처럼 들리는 시어가 하도 처절하여 옷깃을 여몄다. <황규호>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소리를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 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노라
*청주 고령신씨 그 신씨 문중혁명은 1890년대에 이미 개화에 눈을 돌려 젊은이들에게 신교육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신태휴(申泰休)등 몇몇 문중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영천학계(靈川學契)를 만들고, 서울에 거처까지 마련하여 신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단체와 연구단체를 이끈 선각의 인재들이 문중에서 배출되었고, 독립운동가와 언론인 등 기라성같은 개와인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신식교육을 받아 한말 엘리트 관리로 등용된 이도 14명에 이르는 등 당시 전국에서 그만한 개화문중이 없었다는 것이다.
*동사강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輻․1712~1791년)이 지은 우리나라 역사책이다. 논편 17권, 부록 3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왕권신장에 목적을 두었던 기존의 사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외기(外紀)로 떼어 낸 『동국통감』의 잘못을 바로 잡았고, 권력을 휘두른 역사의 인물을 깎아내린 반면 애국명장들은 높이 치켜세웠다. 역사 줄거리 전체에 애국․애민의 사상이 넘치는 가운데 역사가는 의리를 밝혀야 한다는 역사서술 원칙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역사는 강역(彊域)중심의 지리를 전제로 한다는 새로운 발상은 '삼국초기도(三國初起圖)' 같은 여러 지도로 표시되었다. 신채호가 이 책을 역사연구의 자료로 삼은 까닭도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