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민의 젖줄, 무심천에는 추억의 조각들이 널려있다. 청주시민치고 이곳에서 멱을 감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염제(炎帝)가 노기를 띠면 사람들은 청남교(꽃다리)나 서문다리 밑으로 찾아들어 땡볕을 피했다.

철부지 하동(河童)들은 해 가는 줄 모르며 멱을 감고 피라미, 참붕어 떼를 쫓으며 더위를 식혔다. 물이 깊지 않아 익사사고는 거의 없었으나 서문다리, 철교 밑은 수심이 제법 깊었다. 서문다리 철교 위를 겁도 없이 지나다가 기차를 만나면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거나 모래사장으로 뛰어 내렸다.

남사교 아래쪽에는 임시로 건너는 ‘섶 다리’가 있었다. 나무와 흙으로 얽기 설기 엮어 놓은 섶 다리는 장마가 지면 떠내려가고 그 후에 필요에 따라 다시 만들었다. 중간에서 만나면 서로 피하기가 힘들었던 다리다.

무심천 제방의 벚꽃은 수양버들과 바통 체인지를 여러 번 하였다.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 후 청주시는 가로수가 별로 없어 살풍경 하였다’고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은 청주 연혁지에 적고 있다.

이에 영전(永田)서기관 및 스즈키(鈴木) 장관이 나무심기 운동을 벌였는데 주로 아카시아 포플러였다. 그러던 중 1914년,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무심천 제방에 벚나무 심기를 시작하였다. 집집마다 권장하여 적게는 2~3그루, 많게는 10그루씩의 벚나무를 심은 것이다. 청년회 회원들은 벚나무를 심은 후 조선인 아이들이 이 나뭇가지를 꺾지 않도록 감시활동을 폈다. 벚나무가 일본 국화이기 때문에 조선 아이들이 이를 파손할 우려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안 가 무심천 벚꽃은 개화하였고 시민들은 그 모습을 찬탄하였다. ‘휘늘어진 꽃송이가 흰 구름이 낀 것 같기도 하고 눈(雪)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 꽃향기에 취하여 1만의 시민이 비틀거리고 멀리서는 증기기관차를 이용하여 꽃구경을 하고 돌아갔다는 오오꾸마 쇼지의 표현에는 아무래도 과장법이 작용한 듯 하다. 아무리 꽃이 고와도 비틀거리기까지 하랴…

일제 강점기에 ‘사쿠라 마캄라 불리던 벚꽃거리는 광복 후에도 존재하였다. 유리 원판을 사용하던, 거리의 사진사가 남긴 벚꽃 배경 사진은 아직도 많이 전한다. 그러나 벚꽃은 몸살도 심하게 앓았다. 50~60년대에는 청주기계공고 운동장에서 운동경기가 자주 열렸는데 무심천 제방은 자연의 스탠드 구실을 하였다. 극성스런 팬들은 벚꽃 나무에 올라 경기를 관람하였다. 이 같은 소동은 벚꽃나무의 고사를 재촉하였다.

화무십일홍이다. 그처럼 사랑을 받던 벚꽃 나무는 애물단지로 남아 결국 베어졌다. 1972년, 채동환 청주시장이 재직당시 청주민간단체협의회가 황량한 벌판에 벚꽃과 수양버들을 심기 시작했다. 수양버들은 무심천과 조화를 이루며 제방의 운치를 더해주었는데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난 것이다. 다름 아닌 꽃가루 공해였다.

수양버들은 꽃가루가 심하게 날려 꽃 필 무렵에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다. 하는 수 없이 수양버들은 베어지고 다시 벚꽃 동산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60~70년대에 무심천 제방은 이른바 돈 안 드는 ‘재건 데이트’코스였다. 한동안 우범지대로 푸대접을 받던 무심천 제방과 둔치가 정비되면서 시민의 사랑을 다시 받고 있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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