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6인의 애국혼 기리는 시민공원 <김태하>

 청주 시내에서 우암산 순환도로로 접어들면 먼저 '대한불교수도원'과거기에 인접한 '3ㆍ1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 공원 바로 옆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서 승용차와 버스로 가기에 용이하다.

이 공원은 1980년 8월 15일에 충청북도에서 설립한 것이다. 우암산 등산을 즐기는 시민이 여기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교육기관의 백일장, 그림그리기 대회 등의 행사도 자주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공명선거 결의대회와 같은 행사도 하는 이곳은 충절의 정신을 고양하는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태극 구도로 된 앞쪽에 높은 좌대 위의 다섯 분 동상과 동상이 없는 하나의 좌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 곳이 3ㆍ1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청북도 출신의 동상을 모신 곳이다.

▲ 삼일공원 태극 모양의 바닥 중앙에는 '독립선언서' 비석이 있고, 그 앞에 헌화대가 있다. 여기서 묵념을 하고, 한글로 쓴 독립선언문을 꼼꼼히 읽고,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동상을 본다. 가운데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좌측으로 우당(憂堂) 권동진(權東鎭)과 동오(東吾) 신홍식(申洪植), 우측으로 청암(淸庵) 권병덕(權秉悳)과 은재(殷哉) 신석구(申錫九) 다섯 분이 있고, 좌측 끝 청오(靑吾) 정춘수(鄭春洙)는 동상 좌대만 서있다.민족대표 6인 이야기의암 손병희 선생은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였다. 1861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출생하여 1882년(22세)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 때는 북접군 통령으로 싸웠다. 1897년 동학의 제3세교주가 되었으며, 진보회를 조직하여 자주독립 추진 세력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개명했다. 지금의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와 동덕여대 전신인 동덕학교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을 하면서 자주독립과 국운의 발전을 도모했다.1919년 손병희 선생은 3ㆍ1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 대표 15명, 기독교 대표 16명, 불교 대표 2명, 합 33명이 합세하여 3․1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사건 때문에 3년간 복역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1922년 5월 19일 62세로 서거했다. 우당 권동진 선생은 1861년 11월 12일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 부락에서 출생하여 8세 때 서울 인현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한말에 함안군수 육군 참령을 역임하고 개화당에 들어가 혁신운동을 전개하여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의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 후 천도교를 지도하여 도사가 되었다. ▲ 생가 옆에 세워진 의암 동상
3ㆍ1운동 때 천도교측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가하고, 3년의 복역을 마치고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1929년 광주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1년을 복역하고, 계속 독립운동과 민중의 개화에 힘쓰다 광복 후 신한민족당 당수로 건국사업에 공헌했다. 1947년 3월 9일 87세로 서거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청암 권병덕 선생은 1868년 4월 25일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동학에 입도하고 청주 접주를 거쳐 25세에 충경포차 접주가 되었으며 1894년 동학혁명 때는 의암 선생과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호응했으나 실패한 후 각처를 유랑하면서 동학 재건에 힘썼다.

1908년 천도교의 대정이 된 다음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의암이 마련한 인쇄소 보문관 관장이 되었다. 1912년 중앙학교 교장, 1918년 천도교 도사 등을 역임하다 3ㆍ1운동을주도한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며, 2년을 복역한 다음 역사연구서 '조선총사'  '이조전란사'  '궁중비사' 등을 저술했다. 1944년 7월 13일 77세로 서거, 국립묘지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동오 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 1일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와 여러 도시에서 감리교 목사로 선교를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3ㆍ1운동 때는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기독교의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평안도 지방 만세 시위를 조직적으로 전개했으며, 2년의 복역 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 좌대만 남은 청오동상 1937년 1월 27일 65세로 서거, 유해는 그의 고향 인차리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은재 신석구 선생은 1875년 6월 3일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출생했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서울, 개성, 춘천, 원산, 남포 등지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사상과 민족사상을 고취했다.1919년 3ㆍ1운동 때는 기독교 측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2년의 복역 후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신사참배 거부, 평남 용강에서 전승신 예배 거부 등으로 수차 투옥되었다. 광복 후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3․1절 기념 방송사건, 기독교 민주당 비밀결사 사건 등으로 투옥되었고, 1949년 4월 남포에서 반동 비밀결사를 영도하였다는 이유로 10년형 복역중 6. 25 발발 직후인 50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총살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고 1968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청오 정춘수 선생은 1875년 2월 11일 청원군 가덕면 두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경성협신학교 졸업후 목사로 전국 각지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민족정신을 고취한 사실이 있고, 3ㆍ1운동 때 원산 남촌동 남감리교회 목사로 재직하여 동북지방의 독립운동을 영도하여 1년 6개월 복역하였으며, 1934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05일간 옥고를 치른 바 있다.1951년 10월 27일 77세로 서거하여 사회장으로 향리 강내면 궁현리에 안장하였다. 현재 그의 동상은 없고 좌대만 덩그마니 있다. 1996년 2월 8일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가 정춘수는 33인의 명단에 있어도 3․1운동 때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후 여러 차례 친일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그 가운데 일본에 전투기 구입을 위한 헌금, 교회 재산 헌납, 일본 징용 협조 등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동상을 강제로 철거하였다. 독립운동의 공적에 비하여 친일 죄가 큰 것을 후세는 용납하지 않고 징계한 모습에서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북이면 손병희 생가 유허지의암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곳,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는 1979년 충청북도 기념물 30호로 지정한 1만여 평의 넓은 터에 생가 유허지가 조성되어 있다.3. 1공원에서 북쪽 시가지 밖으로 내수를 지나 유허지에 이르러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생가 유허지를 바라보면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선생의 공적이 이 나라 역사에 얼마나 큰 것인지를 느끼게 한다.경건한 마음으로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초가인 생가와 영정을 모신 사당 그리고 기골이 장대한 동상이 보이며, 좌측으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파고다 공원의 팔각정을 재현한 정자, 그 정자 앞에 웅장한 기념관 등이 보인다. 넓은 잔디광장을 조성하여 놓고 수 많은 참배객을 맞이하는데 여기에 가면 선생의 생애를 되새기게 된다. <김태하> ▲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생가터를 성역화한 송병희 유허지. 1976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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