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시내에서 우암산 순환도로로 접어들면 먼저 '대한불교수도원'과거기에 인접한 '3ㆍ1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 공원 바로 옆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서 승용차와 버스로 가기에 용이하다.
이 공원은 1980년 8월 15일에 충청북도에서 설립한 것이다. 우암산 등산을 즐기는 시민이 여기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교육기관의 백일장, 그림그리기 대회 등의 행사도 자주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공명선거 결의대회와 같은 행사도 하는 이곳은 충절의 정신을 고양하는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태극 구도로 된 앞쪽에 높은 좌대 위의 다섯 분 동상과 동상이 없는 하나의 좌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 곳이 3ㆍ1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청북도 출신의 동상을 모신 곳이다.
3ㆍ1운동 때 천도교측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가하고, 3년의 복역을 마치고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1929년 광주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1년을 복역하고, 계속 독립운동과 민중의 개화에 힘쓰다 광복 후 신한민족당 당수로 건국사업에 공헌했다. 1947년 3월 9일 87세로 서거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청암 권병덕 선생은 1868년 4월 25일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동학에 입도하고 청주 접주를 거쳐 25세에 충경포차 접주가 되었으며 1894년 동학혁명 때는 의암 선생과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호응했으나 실패한 후 각처를 유랑하면서 동학 재건에 힘썼다.
1908년 천도교의 대정이 된 다음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의암이 마련한 인쇄소 보문관 관장이 되었다. 1912년 중앙학교 교장, 1918년 천도교 도사 등을 역임하다 3ㆍ1운동을주도한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며, 2년을 복역한 다음 역사연구서 '조선총사' '이조전란사' '궁중비사' 등을 저술했다. 1944년 7월 13일 77세로 서거, 국립묘지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동오 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 1일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와 여러 도시에서 감리교 목사로 선교를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3ㆍ1운동 때는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기독교의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평안도 지방 만세 시위를 조직적으로 전개했으며, 2년의 복역 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사상을 고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