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위로 하얗게 쏟아 진 감꽃들! 아니, 희다 못해 투명하게 맑은 꽃 이파리에 햇살이 튀니 그 깔이 오히려 샛노랗다. 노랗게 토돌토돌한 그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아주 오래 전, 기억마저 희미해진 시절들이 애틋한 그리움이 되어 밀려온다.

어머니의 적삼 같은 꽃!

어쩌면 수줍은 타던 새색시 시절의 내 어머니 모습일 것만 같은 꽃이다. 어린기억 속에 어머닌 항상 한복을 입고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집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였지만 어머닌 가끔 시간을 쪼개 내 손을 잡고 산책을 하셨다. 우리는 철길을 걸었고 남대천 둑길로 쏟아지던 석양빛을 따라 걷기도 하였다. 때론, 감나무 그늘이 아른거리는 장독대에 앉아 감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내 머리에 씌워 주시고 꽃목걸이도 만들어 목에 걸어 주셨다. 달빛 아래서 어머니는 감꽃을 따 내 입에 넣어 주시며 달콤한 그 맛처럼 세상을 살아 가라고 하셨다. 이제서야 겨우 그 말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꽃잎 하나하나 정성스레 실에 꿰어 아름다운 화관을 만들어 가듯, 어린 자식들도 그렇게 사랑의 끈으로 엮어 내시느라 어머니는 자신의 세월들을 모두 소진 하셨으리라.

삶 속에서 힘들 때마다, 아버지의 사업이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았을텐데도 늘 한결같았던 어머니를 떠 올리곤 한다. 내 어린 시절, 파란 하늘아래서 빨랫줄에 매달린 어머니의 옥양목적삼이 펄럭일 때면 바람 속에서 어머니의 향기가 났다. 내가 아이를 낳고 어미의 이름으로 불리우면서 이제야 어렴풋이 알아간다. 태양 아래서 하얗게 바래져가던 어머니의 옥양목적삼 같은 삶을.

지금도 감꽃만 보면 그저 눈물이 고인다.

옛 사람들은 감나무 한 그루도 자손들의 번성과풍요를 위해 울안에 심었다고 한다. 또한 '기자목'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손들의 번성과풍요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풍족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이렇게 옛 어른들은 매사에 소홀함 없는 정성된 마음을 지녔기에 餘白(여백)처럼 넉넉함이 배어나오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정작 나는 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삶에 서툴러, 헐레벌떡 살다 보니 내 아이들에게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하나 만들어 주지 못한 것 같다.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내 아들들, 어릴 적, 그 작은 가슴에 어미의 정과 사랑으로 빚어 놓은 예쁜 꽃씨 하나 심어 주지 못한 것만 같아 늘 아쉬움이 인다.

요즘은 한 집에 아이들이 하나 아니면 둘이다. 형제도 없고 물질도 풍족하니 나누고 배려해야 할 기회가 없어졌다. 게다가 예전처럼 어른을 모시고 사는 가정도 드물다보니 가족 간의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익혀가던 전인교육의 기회마저 잃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인성보다 지식이 앞선 교육이고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럼 없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모습들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가끔은 아이들의 그릇된 행동들을 보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우리 기성세대들의 잘못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머니가 오색의 색동저고리에 깃을 달 무렵이면 윤기나던 초록의 감잎은 어느새 내 색동옷을 닮아갔다. 그럴 때면 으레 맑은 바람 속에서 곶감 단내가 났다. 노란색의 감꽃이 지고 나면 감은 황색으로 영글어 가고, 초록의 잎은 서리가 내려 검게 변하고, 곶감은 하얀색의 분칠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오색의 모습으로 울안에서 사랑 받는 감처럼 되라고 어머닌 내게 해마다 색동옷을 정성스레 만들어 입히신 걸까?

돌아보면 감나무뿐만 아니라 웬만한 괴실나무들도 잎 새의 색이 바뀌고 가을엔 먹음직한 열매를 맺는다. 왜 하필 감나무만이 五色이라는 명칭을 주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 것인지. 그것은 아마도 또 하나의 감나무만이 지니고 있는 다섯가지의 변함없는 성품 때문이리라.

종이가 없었을 때는 종이 대신 감나무 잎에 글씨를 썼기에 文이요, 나무는 화살촉을 만들어 사용하였기에 武, 열매는 겉과 속이 붉은 것이 같다하여 忠, 열매가 서리를 맞아도 끄덕 없으니 節, 홍시가 되었을 때는 이가 없어도 먹을 수 있다하여 孝. 또한, 한 그루의 나무에서 천개가 넘는 과일을 수확하는 풍요가 있어 자손들의 다산, 다복의 염원을 기렸다 하니, 가히 예부터 울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음직하다.

五常과 五色을 지닌 감 같은 인생이라면 내 인생 마지막 날 염라대왕께서 ‘그것참! 너는 한나절 꿈같은 인생 그런대로 잘 살았구나’ 할 것 아니겠는가!

감 같은 인생! 진정 닮고 싶은 삶이다.

五常의 철학을 지닌 감처럼 그렇게 늘 살아 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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