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덕 현(본지 편집국장)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역 맞은편에 대우그룹 본사가 건립된 초기만 하더라도 건물 뒷편은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빈민촌이 있었다. 겉으론 멀쩡한 건물인데도 안으로 들어서면 채 한평도 안 되는 쪽방들이 어지럽게 늘어선 전형적인 소외층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공교롭게도 이곳엔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살았고, 종종 시위를 벌이면서 대우빌딩까지 진출을 시도하는 바람에 당국이 곤욕을 치렀다.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상징이던 대우 본사와 그 뒷편의 빈민촌은 이렇게 서로 어깃장의 이미지로 오버랩됐다.

5년 8개월만에 나타난 김우중은 큼지막한 뿔테안경에 흰머리의 수려한 이마로 상징되던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세계경영을 전파하던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할 정도로 노회한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세계를 누비던 통큰 기업인이 분식회계, 사기대출, 재산해외도피 등으로 무려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3분의 1에 달하는 70조원의 경제범죄를 지은 ‘죄인’으로 변한 모습은 ‘삐까뻔쩍’하는 대우빌딩과 뒷편 빈민촌의 대비만큼이나 혼돈스러웠다.

김우중 생애의 첫 글모음으로 100만부 이상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젊은이 특히 대학생들이 밤새워 읽는 필독서가 되었던 이 책의 에필로그는 성공한 기업가 김우중이 젊은이들에게 충고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꿈, 창조, 도전, 희생, 정직, 겸손을 강조하며 자신의 성공담이 후대에 전파되기를 기대했지만 지금의 김우중은 정반대의 낙인이 찍혀 법정에 설 처지로 전락했다.

어쨌든 김우중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경영인이었다. 장충동에서 신촌 연세대까지 차비가 없어 매일 걸어 다녀야 했던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1967년 쪽돈으로 대우실업(주)를 설립, 승승장구하며 1984년 경영학의 노벨상이라는 아시아 최초 국제기업인상 수상에 이어 1987년 포춘지 선정 세계 50대 기업인으로 선정될 때만 해도 그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그가 세인의 특별한 관심을 끈 사건이 또 하나 있다. 1990년, 당시 국보급(?) 사상가로 활동하던 도올 김용옥과 함께 아프리카 세계여행을 다녀 온 것이다. 이 때의 여행기는 다음해에 ‘대화’라는 책으로 발간돼 역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이들의 동반 여행은 김우중의 원광대 특강이 계기가 됐다. 둘은 만나자마자 첫 눈에 서로를 알아 봤고, 이 자리에서 김우중이 전격적으로 세계여행을 제의해 김용옥으로부터 OK를 얻었다. 당시 김우중의 트레이드마크인 세계경영과 김용옥의 혁신적 사상은 서로를 일거에 연결하는데 적격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갗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갗로 전국적 스타로 부상할 때였다. 전위적 비약과 성찰, 그리고 파격적인 언어구사로 세상을 난도질하던 김용옥은 어느날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원광대 한의학과에 학생으로 입학, 센세이션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두 사람의 아프리카 여행은 세계를 안방드나들 듯하던 김우중과 사상의 시공을 초월하던 김용옥 사이의 완벽한 기(氣)의 일치로 해석돼 많은 이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게 사실이다. 나중에 김우중은 그 때의 여행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사상과 사상의 만남보다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사상은 때론 작전상 위장된 포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막힌 예언이었다. 김우중은 자신이 우려했던 것처럼 지금 파렴치한 경제사범으로 전락함으로써 우리에게 위장된 사상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김우중과 김용옥은 이미 15년전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속단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김우중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중국 출장을 빌미로 해외도피한 것이나, 또 이나라 저나라 돌아 다니면서 자꾸 말을 바꾼 것도 그렇다. 때문에 ‘세계는 넓고 도망갈 곳은 많았던’ 그의 사면이나 재기여론이 나에겐 영 탐탁치가 않다. 김우중이 가지고 있다는 ‘리스트’ 때문에 또 한바탕 푸닥거리를 벌일 우리나라의 정치와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퇴락한 모습에서 한 기업가의 몰락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상과 신념의 위선을 보는 것같아서도 더 그렇다. 김우중의 6년만의 귀국을 접하면서 성공한 기업인의 상징인 유일한박사를 떠 올렸다면 이 역시 대우빌딩에 숙명적으로 씌워진 빛과 그림자의 불협화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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