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성 탈환 의병장 화천당 추모 <김태하>

▲ 3대 창의비 충절의 고장 청주에는 우리에게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고 많지만 그 가운데 3대가 창의(倡義)한 박춘무(朴春茂)와 아들 동명(東命), 손자 홍원(弘遠)의 이야기가 만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청주에서 조치원 가는 도로의 가로수 터널이 시작되는 강서 4거리에서 비하동 부모산 기슭에 원모단(遠慕壇)이란 현판이 있는 소슬 3문이 보이고 우측을 바라보면 약 20m 지점에 커다란 비석이 있다. 이 비석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愍襄公花遷堂朴先生三代倡義事蹟碑(민양공화천당박선생삼대창의사적비)보통 '3대 창의비'라고 부르는 비이다. 민양공은 박춘무의 시호(諡號)이고 화천당은 호이다. 1976년 청주시에서 청주지(淸州誌)를 발간하면서 390여년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춘무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충성심을 높이 추모하는 사람들이 당국에 건의하여 1988년 12월 청주 중앙공원에 '박춘무선생 임란 전장기적비' 를 세우고, 이어서 충북 유도회(儒道會)에서 임진왜란 400주년이 되는 1992년 청주 순천 박씨 집성촌이었던 이 곳에 세운 것인데, 이 비의 옆과 뒤쪽에 박춘무의 3대창의와 그 가문의 충성 이야기가 있다. ▲ 민충사로 들어가는 숭의문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박춘무는 사육신 박팽년의 아우 인년(引年)의 8세 손이었던 기정(箕精)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지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에게서 배웠다. 청주 읍성 탈환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옥천의 조헌(趙憲)도 박춘무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門人)이다.

조헌은 율곡(栗谷)의 문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율곡이 국란 대비로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을 믿고, 임진왜란 7년 전부터 나라가 위태로울때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러 곳에 협력할 동지를 만들어 두고 군량미도 비축해 두고, 무기도 제작해 두고, 전략도 구상해 두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침입한 왜적은 거침없는 파죽지세로 밀어닥쳐 보름만에 청산, 황간을 불태우고, 5월 2일에는 보은, 회인, 청주, 진천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일본군의 일부를 청주성에 주둔시켜서 충청도 지역을 장악하게 했다. 그래서 청주읍성이 함락된 후 3개월은 우리 관군의 통제권은 상실된 상태였다.

 청주성 탈환작전은 7월 하순 시작되었다. 청주의 관군이 무너지기 전 4월에 박춘무는 의병모집 격문(檄文)을 지어 종사(從事) 한혁(韓赫)을 시켜 여러 고장에 보냈다. 문중과 곳곳에서 일어선 의병들이 700여명에 달하자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부모산에서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7월 4일 청주 복대에서 아들 동명(東命)과 아우 춘번(春蕃)을 앞세워 기병(起兵)했다. 그리고 공주에서 일어난 조헌과 승장(僧將)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청주에서 만나  8월 1일 의병, 승병, 관군, 3개 연합군 3600여명이 청주성을 공격했다.

조헌과 영규의 의병군은 서문을, 관군은 북문을, 박춘무는 남문을 야음을 틈타 공격하다가 서문을 집중적으로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기상이 악화되어 주춤하는 사이에 왜군은 북문을 향하여 달아났고, 의병군이 무혈 입성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였으며, 이 낭보는 우리 민족에게는 승전의 희망을, 적군에게는 패전의 위협이 되었던 것이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전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 임란 당시 왜군과 혈전을 벌이는 의병들의 전투장면 기록화 청주성 탈환 후 공론에 따라 조헌은 좌의대장, 박춘무는 우의대장이 되어 좌의대장은 황간 영동 이남의 적과 싸우고, 우의대장은 금강 이북의 적과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산이 위급하다 하여 조헌의 좌의대는 700여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박춘무는 진천에서 적과 싸워 물리치고나자 선조가 계신 의주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어렵게 선조에게 달려갔다. 그 후 계속 왕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박공은 침술이 뛰어나 선조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병고를 치유했다. 그러다가 선조가 환도하자 박춘무는 환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그간에 여러 고을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의 사심 없는 충성심이 돋보인다. 그가 별세하자 왕은 우참찬(右參贊)을 증직하고 민양(愍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 이 '3대창의비'에는 이 밖에도 박춘무 일가의 창의 기록이 있다. 아들 동명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종군한 다음 병자호란 때 또 창의하여 남한산성에서 순국한 것과, 손자 홍원(弘遠)은 이괄(李适)의 난 때 창의하여 안현(鞍峴)에서 대승한 빛나는 이야기의 기록이다. 이런 충성심의 계승이 우리 고장 청주에 있었음을 알고 교육의 도장을 삼을 것이다. '3대창의비'를 보고 원모단으로 가서 보면 이 원모단은 순천 박씨 후손이 1930년부터 선조의 제사를 모시다가 1966년에 현재의 원모단을 짓고 7위(位)의 열선조를 모신 곳이다. 7위의 비를 살펴보고 원모단을 나와서 민충사(愍忠祠)로 향해야 한다. 그러려면 원모단에서 강서4거리로 나와 우회전하여 가로수 터널도로로 약 400m 지점에서 우측 마을(주봉마을)로 들어 가면서 산기슭의 사당을 찾아가야 한다. 주소는 비하동 산 31-1이다.여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박춘무, 박춘번, 박동명, 이시발(임란 때 청주와 진천에서 승전하고, 등과 입조하여 외교와 국방에 큰 공적을 남김), 한혁(임란 때 의군 종사로 격문 뿌려 모군에 공적 큼), 정순년(鄭舜年 : 박춘무의 매부로 임란 때 군량미를 자진 헌납했음), 민여함(閔汝函 : 박춘무의 사위로 재산을 바쳐 의병을 먹여 살리고 종군함), 8위는 7백 의군으로 나서서 향토를 지킨 수호신(守護神)을 모셨고, 마지막으로 박춘무의 친손 홍원 등 9위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다. ▲ 민충사 전경
이 민충사는 박씨 문중만의 사당이 아니라 임란 의병들의 애국혼을 기리기위해 이름 없이 순절한 많은 수호신을 함께 모셨다. '민충사' 라는 민(愍)은 민양공(愍襄公)의 첫 자에서, 충(忠)자는 선봉장이었던 아들 동명의 시호 충경공(忠景公)과 종사관이었던 이시발의 시호 충익공(忠翼公)의 첫 자에서 딴 것이라 한다.

민충사 건립을 계기로 임진란 당시 박춘무의병장과 이고장 의병들의 활약상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늦은 감은 있으나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주성 탈환에 우리 고장 출신 의병들이 그 선봉에서 섰다는 사실을 되새겨 충절과 애향심의 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김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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