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박춘무는 사육신 박팽년의 아우 인년(引年)의 8세 손이었던 기정(箕精)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지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에게서 배웠다. 청주 읍성 탈환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옥천의 조헌(趙憲)도 박춘무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門人)이다.
조헌은 율곡(栗谷)의 문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율곡이 국란 대비로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을 믿고, 임진왜란 7년 전부터 나라가 위태로울때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러 곳에 협력할 동지를 만들어 두고 군량미도 비축해 두고, 무기도 제작해 두고, 전략도 구상해 두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침입한 왜적은 거침없는 파죽지세로 밀어닥쳐 보름만에 청산, 황간을 불태우고, 5월 2일에는 보은, 회인, 청주, 진천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일본군의 일부를 청주성에 주둔시켜서 충청도 지역을 장악하게 했다. 그래서 청주읍성이 함락된 후 3개월은 우리 관군의 통제권은 상실된 상태였다.
청주성 탈환작전은 7월 하순 시작되었다. 청주의 관군이 무너지기 전 4월에 박춘무는 의병모집 격문(檄文)을 지어 종사(從事) 한혁(韓赫)을 시켜 여러 고장에 보냈다. 문중과 곳곳에서 일어선 의병들이 700여명에 달하자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부모산에서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7월 4일 청주 복대에서 아들 동명(東命)과 아우 춘번(春蕃)을 앞세워 기병(起兵)했다. 그리고 공주에서 일어난 조헌과 승장(僧將)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청주에서 만나 8월 1일 의병, 승병, 관군, 3개 연합군 3600여명이 청주성을 공격했다.
조헌과 영규의 의병군은 서문을, 관군은 북문을, 박춘무는 남문을 야음을 틈타 공격하다가 서문을 집중적으로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기상이 악화되어 주춤하는 사이에 왜군은 북문을 향하여 달아났고, 의병군이 무혈 입성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였으며, 이 낭보는 우리 민족에게는 승전의 희망을, 적군에게는 패전의 위협이 되었던 것이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전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민충사는 박씨 문중만의 사당이 아니라 임란 의병들의 애국혼을 기리기위해 이름 없이 순절한 많은 수호신을 함께 모셨다. '민충사' 라는 민(愍)은 민양공(愍襄公)의 첫 자에서, 충(忠)자는 선봉장이었던 아들 동명의 시호 충경공(忠景公)과 종사관이었던 이시발의 시호 충익공(忠翼公)의 첫 자에서 딴 것이라 한다.
민충사 건립을 계기로 임진란 당시 박춘무의병장과 이고장 의병들의 활약상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늦은 감은 있으나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주성 탈환에 우리 고장 출신 의병들이 그 선봉에서 섰다는 사실을 되새겨 충절과 애향심의 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김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