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이 열리고 산맥과 냇물이 바다를 연모하여 서쪽으로 달릴 때, 금강 위쪽 미호천 언저리 차령산맥 노령산맥 사이에 갈비 살 같은 기름진 땅이 있었으니 이곳이 곧 맑은 고을 청주, 청원이 삶의 보금자리를 튼 곳이다.

뫼 부리 생김새가 험난하지 않고 고만고만한 산들이 어깨를 엇 비키며 포개질 듯 말 듯 야산, 구릉을 형성한 곳에 비단강 금강(錦江) 한 줄기 양반걸음으로 여유 만만하게 서쪽 바다로 흘러드니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또한 넉넉하다.

지금부터 50 만 년 전,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주먹도끼를 든 선인(先人)이 나와 문명의 횃불을 올리며 맑은 고을 탄생 축포에 점화하였다. 4 만 년 전, ‘흥수 아이’는 지혜를 갖춘 호모사피엔스로 청주, 청원 사람의 조상이 된다.

이처럼 청주, 청원은 아득한 옛날부터 역사의 동반자다. 역사시대를 전후하여 마한(馬韓)의 옛 땅엔, 부모산에 있었다는 아양국(我養國, 我讓國) 등이 청동이나 질그릇 문화의 꽃을 피웠고 그 원삼국(原三國) 시대의 고분들이 송절동 일대에 즐비하다.

강력한 철기집단인 이른 백제가 마한 세력을 누르고 이곳을 백제영토에 편입시키며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렀다. 실제로 부모산성은 발굴조사결과 백제의 성으로 확인되었다. 고구려 시대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고 아찬(阿?) 원태(元泰)를 사신(仕臣)으로 삼았다.

청주(淸州)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0) 때이다. 성종(成宗) 2년(983)에는 전국을 12목(牧)으로 개편하였는데 청주에도 목(牧)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 서원경의 맥은 이처럼 청주목으로 이어지며 호서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이다. 청주목은 연산(燕山) 목주(木州) 2군과 진천, 전의, 청주, 도안, 청당, 연기, 회인 7현을 관할하였다.

조선초기에 세워진 청주향교는 임금(세종)이 서적을 하사한 삼남 제일의 향교였으며 1571년,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 청주목사로 재직시 만든 ‘서원향약’은 우리나라 향약의 효시가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592년 임진왜란당시,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왜적은 청주읍성을 점거하였으나 의병장 조헌, 박춘무,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이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니 이 전투는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승전보다.

숙종, 영조 재위 때인 1710년~1750년 간, 상당산성을 크게 개축하였으며 1728년 이인좌의 난 때는 청주읍성이 함락되기도 했다. 이같은 변란 등으로 청주목은 여러 차례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는 부침의 길을 걸었다.

청주목은 고종 33년(1896)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청주군(淸州郡)이 되고 26개 면을 관할하였다. 충청북도는 이때 생겨난 것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행정적인 분류는 아니지만 정서적인 분류로 충북을 ‘충청좌도’, 충남을 ‘충청우도’로 칭해오다 남, 북도로 바뀐 것이다.

1908년에는 충주에 있던 관찰부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청주는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미군정 하에서 청주읍은 청주부(淸州府)로 승격되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청주목 동헌인 청녕각(淸寧閣)이 청원군청 내 있던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60년 가량, 두 집 살림을 차려오던 청주, 청원이 합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원래 한 뿌리였으니 당연한 처사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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