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란 때 순국한 송상현의 애국혼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부사로 인의(仁義)의 기개(氣槪)로 적장(敵將)을 놀라게 한 천곡 송상현(宋象賢)의 애국혼!

▲ 충렬사 송상현은 1551년 (명종 6년) 서울에서 출생,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본관은 여산(礪山),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 26세에 문과 급제,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 벼슬을 거쳐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도 두 번을 다녀왔으며,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 이듬해(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장렬히 순국하였다. 청주에서 조치원 쪽의 가로수길을 가다 경부고속도로 진입로 전방 약 1km 지점 수의동의 우측에 강촌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 그 분을 모신 사당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3개의 정문(旌門)이 먼저 반긴다. 좌측에 있는 것이 부위부강(夫爲婦綱) 열녀문이고, 가운데가 군위신강(君爲臣綱) 충렬문이며, 우측이 부위자강(父爲子綱) 효자문이다. 이 삼강(三綱)의 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있고, 그 안에 충청북도 기념물 16호인 충렬사가 있다.눈을 들어 앞을 보니 ꡒ충즉진명(忠則盡命)ꡓ이라는 한문 편액이 보인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다했다는 뜻이다. 일본의 수신사 평조신(다이라)이 조선에 자주 오가면서 천곡과 친교가 있어 일본이 조선을 침입할 것이니 부사직을 사임하고 피신하라고 귀뜸해 주었지만 천곡은 오히려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임진왜란을 대비했었다.일본은 선조 25년에 명나라를 치러 가겠으니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며 20만 군사를 부산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동래성으로 쳐들어 왔다. 동래성 병사 이각(李珏)이 중과부적에 놀라 달아나려하자 대의(大義)로 꾸짖으며 사수(死守)를 도모했으나 결국 도망치고 말아 부사인 천곡이 서둘러 병사들을 단속하며 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전칙전의 부전칙 가아도(戰則戰矣 不戰則 假我道)"왜장이 이런 글을 보내왔다.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기 싫거든 길을 빌려달라는 뜻이었다.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천곡은 이런 글을 적에게 던졌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4월 15일 오시(午時)에 성은 함락되었다. ▲ 충렬사 경내 새로지은 사당
천곡은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네번 절 한 다음 부친에게서 받은 부채에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다.  

"고성월운 열진고침 군신의중 부자은경(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진에서는 도와줄 기척도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아비와 자식의 은정은 가벼이 하오리다. ' 라는 뜻이다. 천곡은 이 혈서를 아들과 부인에게 주며 고향의 부친께 전하라고 했다.

▲ 신도비 ▲ 묘소 ▲ 천곡기념관
이를 받아 본 부친은 "과연 내 아들이다"라고 하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부인은 피신한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훗날 천곡과 합장하지 않았다. 천곡이 가족을 고향으로 보낸 다음 일본의 선봉장이 된 다이라가 급히 찾아와 천곡의 피신을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이어 들이닥친 왜장이 항복을 요구하자 천곡은 관인(官印)을 오른손에 쥐고 완강히 거부하였다.

왜군은 천곡의 오른 팔을 칼로 쳤다. 그러자 천곡은 떨어진 관인을 왼손으로 잡고 항거했다. 왜군은 왼팔을 잘랐다. 그러자 발로 관인을 밟았다. 또 발을 잘랐다. 이번에는 입으로 물었다. 그러자 천곡의 목을 베었다. 이 때 천곡의 목에서 피와 함께 서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그 끝이 하늘로 향하였다.

천곡의 충정을 하늘도 아는 것을 본 왜장은 놀랐다. 그래서 천곡을 해친 병사를 참하여 제물로 바치며 명복을 빌고, 천곡을 그 곳에 장례 지내고 나무를 깎아 표를 해 주었다.

장렬한 순국의 사실이 방방곡곡에 은밀히 알려지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의병으로 나섰으며, 성내의 장졸들도 죽음으로 싸웠고, 애첩 한 소사, 이 소사는 지붕에 올라 기와를 던지며 싸우다 왜병의 조총에 유명을 달리해서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강촌 충렬문에 그 이름을 부사와 함께 모셔 충절을 돋보이게 하였다.

천곡의 묘는 왕명으로 명당에 옮기게 하여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에 있는 묵방산 임좌로 모셨다. 그리고 자손에게 전면의 십리 전답과 산을 하사하여 대대손손 제사를 봉향케 했다.  <김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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