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부사로 인의(仁義)의 기개(氣槪)로 적장(敵將)을 놀라게 한 천곡 송상현(宋象賢)의 애국혼!
천곡은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네번 절 한 다음 부친에게서 받은 부채에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다.
"고성월운 열진고침 군신의중 부자은경(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진에서는 도와줄 기척도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아비와 자식의 은정은 가벼이 하오리다. ' 라는 뜻이다. 천곡은 이 혈서를 아들과 부인에게 주며 고향의 부친께 전하라고 했다.
이를 받아 본 부친은 "과연 내 아들이다"라고 하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부인은 피신한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훗날 천곡과 합장하지 않았다. 천곡이 가족을 고향으로 보낸 다음 일본의 선봉장이 된 다이라가 급히 찾아와 천곡의 피신을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이어 들이닥친 왜장이 항복을 요구하자 천곡은 관인(官印)을 오른손에 쥐고 완강히 거부하였다.
왜군은 천곡의 오른 팔을 칼로 쳤다. 그러자 천곡은 떨어진 관인을 왼손으로 잡고 항거했다. 왜군은 왼팔을 잘랐다. 그러자 발로 관인을 밟았다. 또 발을 잘랐다. 이번에는 입으로 물었다. 그러자 천곡의 목을 베었다. 이 때 천곡의 목에서 피와 함께 서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그 끝이 하늘로 향하였다.
천곡의 충정을 하늘도 아는 것을 본 왜장은 놀랐다. 그래서 천곡을 해친 병사를 참하여 제물로 바치며 명복을 빌고, 천곡을 그 곳에 장례 지내고 나무를 깎아 표를 해 주었다.
장렬한 순국의 사실이 방방곡곡에 은밀히 알려지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의병으로 나섰으며, 성내의 장졸들도 죽음으로 싸웠고, 애첩 한 소사, 이 소사는 지붕에 올라 기와를 던지며 싸우다 왜병의 조총에 유명을 달리해서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강촌 충렬문에 그 이름을 부사와 함께 모셔 충절을 돋보이게 하였다.
천곡의 묘는 왕명으로 명당에 옮기게 하여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에 있는 묵방산 임좌로 모셨다. 그리고 자손에게 전면의 십리 전답과 산을 하사하여 대대손손 제사를 봉향케 했다. <김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