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 대도소가 있었던 솔뫼마을 <임병무>
청주의 손병희와 그의 나이 많은 조카 손천민(孫天民), 청풍의 성두한, 보은의 황하일 등은 동학운동의 지도자였고 남접의 우두머리격인 서장옥(徐章玉)은 다름아닌 청주출신의 서인주(徐仁周)이다.
동학운동의 서곡격인 보은 장내리 취회에는 2만5천명의 동학교도가 집결했고 동학의 2대교주인 최시형은 옥천 청산에서 한때 숨어 지냈다. 그리고 보은 종곡리(북실)는 동학군이 관군에 밀려 최후를 마친 곳이다. 이처럼 동학운동에 충북이 주무대가 되었음에도 우리는 우리 고장의 역사를 스스로 평가절하했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동학군은 흔히 남접(南接)과 북접(北接)으로 나누는데 충북은 양접(兩接)이 모두 태생하고 활동한 특이한 지역성을 갖고 있다.
'최시형의 제자로 서장옥이라는 자가 있다. 학력과 재주가 출중하다. 서장옥의 제자로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있다. 이들 제자들은 서장옥의 학력과 지혜가 최시형보다 뛰어나다고 하면서 마침내 남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최시형의 제자들은 스승에 권하여 북접이라 부르자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학에는 남접과 북접이라는 칭호가 생겼다.'(충북100년)
북접이 주로 동학교주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복권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에 주력한데 비해 남접은 반봉건, 반외세 투쟁을 강화했다. 나중에는 행동과 노선이 같아졌지만 초창기에는 남접이 북접보다 훨씬 투쟁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또 남접에는 농민층이 위주가 된 반면 북접에는 농민과 더불어 상당수의 양반층도 참여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청주성을 겨냥하였다. 삼남의 요로에 있는 청주성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서울로의 북상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남북접 연합전선을 구축한 동학군은 공주, 청주, 충주를 겨냥하였다.
손천민은 집의 뒷산인 '노가지봉'을 통해 몸을 숨기며 이 집을 드나들었다. '노가지봉'밑에 쪼그려 앉은 도소는 은신처로 제격이었다. 그러나 손천민이 이 집에서 상주한 것 같지는 않았고 동학 집회가 있을 때마다 간헐적으로 사용한 것 같다. 동학군의 조련장소였던 용대(龍垈)는 솔뫼 마을 뒤편에 위치해 있다. 주변은 야산이고 웅덩이처럼 움푹 들어간 지세여서 여간해서 외부로부터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다.
강대륜씨는 부친으로부터 "마을 뒤 용대에서 동학군이 화승총을 쏘고 화약을 만들며 죽창, 죽칼 등으로 훈련했으며 택견도 연마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야산에 둘러싸인 은폐장소에서 거사를 앞두고 동학군이 조련을 했던 것이다. 현재는 동학군의 발자취를 찾을 길 없고 전답으로 변한 현장에서 농사채비에 바쁜 농민들의 모습만 간간이 보일 뿐이다. 여기서 청주, 청원 일대의 동학군을 지휘한 손병희, 손천민의 가계(家系)를 잠시 훑어보기로 한다.
의암 손병희는 철종 12년(1861) 4월8일, 당시 조선의 행정구역상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山外二面) 대주리(大周里)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에 공주목(公州牧)관하에서 이주해온 밀양손씨(密陽孫氏)가 정착한지 5대, 약 1백50년 전의 일이다. 족보상 대주리의 밀양 손씨는 무과계통의 양반가계였던 것 같으나 청주목에 이주한 이래 향리(鄕吏)의 소임을 맡아왔다고 한다. 손병희의 부친 두흥(斗興 1815-1873)은 아들 넷을 두었다.
정실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사이에 손천민의 아버지인 병곤(秉坤)을 낳았고, 소실인 경주 최씨(慶州 崔氏)는 병희(秉熙), 병흠(秉欽), 병권(秉權) 삼형제를 낳았다. 손천민은 손병희의 조카이나 손병희보다 7살 위였다. 손천민도 선대를 이어 청주목의 이방을 지냈다고 한다.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에 의하면 손천민은 이방으로 있으면서 은밀히 동학에 들어가 수도와 포교를 했다. 그는 서삼촌인 손병희까지 애를 써서 끌어 들였다고 한다.
손천민은 동학 대접주로 활동하다가 1894년 농민전쟁의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피신생활을 오래했지만 1900년 체포되어 서울에서 참형을 당했다. 동학운동에 있어 손천민의 활동은 서삼촌인 손병희를 훨씬 앞지르고 있으나 3. 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중 수위(首位)인 손병희의 그늘에 가려 그의 진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손천민이 솔뫼 마을을 본거지로 한 것은 우선 솔뫼의 지세에 있었던 것 같다. 솔뫼는 백마고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남들 벌판에 외돌아 앉아 외부로부터 시선을 차단하는 지형이다. 게다가 이곳은 보은, 회덕 등지로 통하는 길목에 있다.
이곳은 동학군의 은폐 및 훈련과 타 지역과 연락을 취함에 있어 용이한 장소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강대륜씨의 조부인 영문(永文)은 동학의 대접주인 손천민의 옆 집에 살았으며 그 또한 동학의 접주였다.
동학의 접주는 접주 개인을 단위로 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접주와 접주가 이웃에 붙어사는 경우도 많았다. 영문은 동학의 접주로 활동하다가 관군에 붙잡혀 처형당했고 그의 부인은 목을 매어 자결했으며 이통에 아들 학수(學洙:강대륜의 부친)는 앵금장이, 또는 중으로 변복을 하고 전국을 떠돌았다.
청주병영의 관군은 솔뫼를 습격, 동학교도를 처형하였고 마을을 불태웠다. 강대륜씨의 집안은 풍비박산되었고 솔뫼는 쑥대밭이 되었다. 1894년, 동학군이 무장봉기할 때 청주일대의 동학군이 솔뫼로 집결, 보은 장내리로 진군하고 이 군대가 손병희의 지휘아래 옥천~논산을 거쳐 전봉준 군대와 합류,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였다.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여 영동, 보은으로 후퇴하다 보은 종곡(북실)에서 일본군에 상당수 살육 당했다. 당시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면 강대륜씨의 가계(家系)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다.
강대륜의 집안은 3대에 걸쳐 동학을 신봉했다. 강대륜의 고조부인 재옥(在玉)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냈고 증조부인 기회(起會)는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재산이 넉넉한 토호세력이었다.
재옥은 천석지기 부자로 오창에서 받아들이는 도지만 해도 수백석 이었으며 도지를 바리바리 운반키 위해 한겨울 내내 까치 내(鵲川) 나룻배가 쉴 틈이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아들 기회는 침술로 많은 돈을 벌었다. 행랑채에는 수 십명의 머슴이 기거할 정도였다. 재옥-기회-영문으로 내려오는 가계는 대대로 택택한 살림을 꾸렸고 이같은 재산은 동학 포교 자금이 되었던 것이다.
영문의 집에는 오가는 사람이 들벅거렸다. 거의가 동학교도들이고 이곳에서 포교와 더불어 거사를 준비했다. 때문에 비밀이 밖으로 샐까 해서 머슴은 대개 벙어리를 고용했다. 비밀 모임이 있으면 동구밖에 금줄을 쳐 외부인과의 접촉을 끊었다. 영문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복을 입었다. 일종의 위장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때는 차일을 치고 아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솔뫼는 물이 귀한 까닭에 아이들은 주로 물을 길었다. 영문의 아들 학수도 동네 아이들과 함께 물을 길었다.
밤으로는 엽전 꾸러미가 조랑말에 실려 나갔고 때로는 쌀가마니나 어음도 거래했다. 모두가 거사자금이었다. 엽전 꾸러미가 실려 나가는 대신, 들어오는 것은 자루였는데 이 자루속에는 화승총 등 병장기가 숨겨 있었다. 들어오는 것은 흙(화약)이고 나가는 것은 쌀(자금)이었다.
▲ 동학 후손인 강순원씨가 이고장 동학운동을 증언하고 있다. | ||
동학군은 행전을 치고 짚신을 삼았는데 짚신이 모자라 삼으로 삼은 삼신을 만들기도 했다. 연락책임자는 보은, 청산, 문의 등지로 연락을 취했는데 임실, 군산포 등 호남지방과의 왕래도 잦았다. 서찰은 대개 보은서 오갔다.
동학군은 조선 광목으로 전투복장을 갖추고 감발을 쳤다.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는 말은 이러한 동학군의 전투모습에서 나온 말이다. 화승총과 더불어 화약, 대창, 대발 등 병장기도 계속 늘려 나갔다. 동학군의 깃발도 어느정도 준비됐다. 거사준비가 거의 완료된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누구의 밀고인지 거사계획은 탄로 났고 눈치 챈 관군이 물밀 듯 솔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갑오년(1894) 윤 동짓달 열 하루, 남들 벌판엔 안개비가 질척질척 내렸다. 동학군이 시래기 국으로 요기를 하고 출동을 준비하던 차에 관군은 까마귀떼 처럼 몰려와 솔뫼를 순식간에 덮쳤다.
화승총의 콩 볶는 소리와 함께 솔뫼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수백명에 달하는 동학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제대로 못 치르고 패퇴했다. 골짜기마다 동학군의 시신이 널렸다. 불에 타서 까맣게 그을린 시체도 있었다.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 향기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던 솔뫼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영문은 아들 학수에게 피신을 일렀다. 15세의 학수는 보은으로 일단 몸을 숨겼다. 소나무 송(松)자가 붙은 마을로 피신을 가야 살 수 있다고 하여 보은 속리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며칠후 집이 궁금하여 솔뫼로 와 보니 온 동네가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었고 친척 12명이 전화(戰禍)에 목숨을 잃었다. 학수의 떠돌이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앵금장이로 변복을 했고 때로는 중이 되어 오대산 등지를 떠돌았다. 월정사에서 겨울을 나고 솔뫼로 와 보니 남은 사람들은 움막을 치고 살면서 학수를 붙잡고 울었다. 동학에 가담안한 사람은 농사를 짓고 살아도 된다는 방(榜)이 나붙었으나 솔뫼는 생기를 잃었다.
학수는 관군과 왜경의 눈을 피해 유랑생활을 계속하다 늦장가를 들어 비로소 아들을 얻으니 그가 강대륜이다. 강대륜은 한맺힌 동학교도의 후손이다. 난리통에 멸문지화를 당하다시피 하여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 채소장수에, 막노동에 안 해본 일이 없다 한다.
"무슨 일이든 도장찍지 말라, 사람 많은데 가지 말라, 무슨 도(道)이든 믿지 말라" 강대륜씨가 선친으로부터 생전에 새겨들은 말이다.
솔뫼 뒷산의 푸른 솔은 선구자의 기개를 말해주는 듯 고고했으나 손천민의 집터 뒤쪽으로는 동학대신 기독교의 첨탑이 높이 솟구쳐 있다. <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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