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3> - 충주시<1>
이 설법을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이 때 미륵의 설법으로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나 극락세계로 가는 중생들은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 교화에서 빠진 중생들과, 그 이후에 사바에서 살다간 모든 중생들이다. 따라서 이 미륵보살을 보처미륵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성된 우리나라 미륵신앙은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 민중 속으로 뿌리를 깊게 내렸다. 미륵신앙이 민간신앙화 되면서 석불뿐만이 아니라 잘생긴 자연석이나 석주 등을 미륵님이라 부르고, 심지어는 장승조차도 미륵이라 부르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미륵은 중생들에게 미래불로서 희망을 주는 부처님이요, 현생의 고통에서 중생들을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주는 구제불이라는 점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미륵대원지는 충주 동남쪽 33㎞ 지점에 미륵리라는 마을에 있다. 미륵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마을 사람들이 ‘미륵댕이’라고 부르는 보물 제96호 미륵석불입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륵석불입상이 있는 절터는 ‘미륵사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대원지의 창건과 미륵석불입상의 영험함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아래와 같다. 신라 천년 사직이 고려에게 넘어가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 너머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마의태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쪽고개를 넘으면 절을 지을 만한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에 마애불을 조성하면, 억조창생에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꿈을 깬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상의하니 똑같은 꿈을 덕주공주도 꾸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매는 하늘재를 넘어서 마의태자는 미륵석불입상을, 덕주공주는 월악산 마애미륵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륵석불입상과 마애미륵불이 마주 보고 있는데, 국가에 큰 일이 일어나면 두 부처님 보옥에서 불빛이 비치며, 그 불빛이 어찌나 밝은지 밤중에도 땅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몽고가 침입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최근에는 한국전쟁 때도 그랬다고 하지만 미륵불의 영험함을 과장하려는 중생들의 욕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현재 이 절터에는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초기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는데, 그것으로 사찰의 창건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절터 위에 법등을 밝혔던 사찰의 구체적 연혁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발굴을 통해 발견한 명문와 중에 ‘미륵당’, ‘대원사’ 등의 글씨가 확인되어 그것으로 사찰 이름을 추정해 볼 수는 있으나, 다른 문헌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명문와 가운데는 고려 중기인 1192년(명종 22)에 해당되는 연호가 새겨진 것이 있어 그 무렵에 사찰이 중건 또는 중수된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다.
『고려사』에도 ‘충주 대원사’에 관한 기록이 있으므로 대원사는 당시 손꼽는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254년(고종 41) 몽고가 고려를 침입해 충주산성에 이어서 상주산성 등을 공격했었는데, 이 무렵에 절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충주에서 상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하늘재(계립령)를 넘어야만 했으므로 몽고군이 절을 지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발굴을 통해 고려 말 조선 초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나타나며, 조선시대 초에도 대규모 중수가 있었음을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절은 다시 소실된 듯하다.
그 뒤 18세기 무렵에 중수되었다고 전하지만 1936년의 홍수로 인해 금당터 동쪽에 산사태가 나서 매몰되면서 절은 폐허가 되었다. 현재 미륵사지는 사적 제31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긴 네모꼴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 14,000평 정도의 큰 절터로 1977년부터 청주대학교에서 1, 2, 4차,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3차 발굴작업을 하여 옛날 절터의 모습을 한 주춧돌 등의 배치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미륵대원지는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임이 드러났다. 곧 금당, 석등, 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방식인 것을 알 수 있다. 금당터는 남쪽 끝 3면에 석축을 한 자리인데, 그 중앙에 북쪽을 바라보고 위치한 미륵석불 입상과 그 앞 북쪽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석등, 오층석탑 등이 배치되어 있다.
석굴은 반만 석축을 하였으며, 그 이상은 목조로 지어 옥개부가 있었으며 석불입상 앞으로는 전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굴은 한국 석굴 사원의 계보를 찾고 연구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유적으로, 창건연대 등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곳이다. 발굴 시에는 용두상, 사자상과 청동귀면상, 금동소탑 옥개석 및 각종 와당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군마가 그려진 기와, 호랑이가 노루를 쫓는 그림이 있는 인면와 등 독특한 것이 다수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기와 가운데는 또한 평와에 ‘미륵당초‘라고 새긴 명문와가 발견되어 이곳을 미륵사지로 추정하게 되었다.
금당은 불상이 있는 주실과 주실 앞에 있는 전실로 구분된다. 주실은 평면이 사각형으로 북쪽 방향을 제외한 3면을 돌로 높게 쌓아 올렸으며 그 벽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돌기둥과 돌기둥 사이에는 벽장과 같은 시설이 3개씩 있어 그 안에 앉아있는 나한상 등이 조각된 돌판 3매씩을 안치했다. 이 벽장 시설 위에 다시 돌을 쌓았고 동벽과 서벽에는 다시 6개씩의 벽장시설을 하여 앉아 있는 보살상을 1구씩 안치했다.
벽장 시설이 없는 남쪽 벽면에는 앉아 있는 부처와 보살상이 있다. 벽체의 윗면에는 안쪽에 주춧돌로 보이는 큰돌이 같은 규격으로 놓여 있어 지붕시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실에는 주춧돌이 사방에 놓여 있으며 그 중앙에 넙적한 판석을 깐 바닥에 놓인 대좌 위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금당 정면 중앙에 있는 미륵리 오층석탑은 보물 제95호로 높이 6m이며 이 석탑은 자연석을 다듬어 지대석과 기단부를 조성했으며, 기단부의 내부를 파내어 4면의 벽석을 만든 형태다. 기단의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지 않고, 갑석은 형식적 수법을 가미한 매우 좁은 두 장의 판석으로 덮여 있다. 탑신부는 초층 옥개석이 두 장일 뿐 다른 옥개석은 한 장씩으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석 역시 형식적으로 우주 모양을 모각하였을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노반은 지나치게 커서 탑신석으로 오해받기 쉬우며, 복발은 장식이 없는 반구형으로 꼭대기에는 철제 찰주만이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또 이 탑은 의상대사와 관련하여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철주가 피뢰침처럼 남아있는 오층석탑 상층부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대나무가 살아있단다. 이 대나무는 의상대사가 죽장을 탑 위에 꽂아놓고, “이 죽장이 살아있으면 나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고, 죽장의 대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은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살펴봐도 대나무 잎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자료 사진에서는 분명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의상대사의 죽장인지는 의심이 간다. 미륵리 오층석탑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시대의 고승이기 때문이다. 사원 경내의 오층석탑에서 북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 돌거북이 있다.
돌거북은 1977년 발굴 당시에 반만 드러났던 것이 출토된 것으로, 등에는 비석을 세울 수 있게 홈을 파 놓았으나 비신은 찾지를 못하고 있다. 정교한 맛은 없으나 규모가 매우 커서 길이 6.05m, 높이 1.8m, 너비 4m로 우리 나라 최대일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큰 거북이다. 이 비석만 발굴된다면 미륵사지의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층석탑 오른쪽 세계사가 있는 개울가에는 온달 장군이 힘자랑을 했다는 공깃돌 바위가 있다.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로 유명한 온달 장군은 고구려의 장수로서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고토를 회복하지 아니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신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전한 것으로 역사에 전해온다. 그런데 그 온달 장군이 단양군 영춘면 온달성에 산성을 쌓으니 바로 온달산성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이곳 미륵리(계립령)에도 온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온달장군은 신라가 개척한 계립령 밑에 군사를 주둔하여 성을 쌓고 군사를 교련했다. 그는 미륵당 내의 물을 마시고 힘이 세어졌는데, 바로 이곳에 있는 공깃돌을 갖고 힘자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공깃돌을 ‘온달장군 공깃돌’이라 부른다. 그 돌을 들어내면 하늘이 노하여 마른 하늘에 청천벽력이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 공깃돌 바위. 온달 장군이 힘자랑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 ||
또한 초등학교로 쓰던 학교 앞에는 말무덤이라는 큰 무덤이 있는데, 온달 장군의 애마 무덤이란 속설도 있다. 미륵리 사지 안에는 그 밖에 2개의 연화문을 조각한 당간지주가 쓰러진 상태로 누워 있으며, 불상 대좌로 보이는 연화문 받침돌이 있다. 전부 1977년의 발굴시 출토된 것이다. 미륵리에는 예전에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있다. 미륵리 와요지는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결과 17세기 이후 20세기 전반까지의 백자 가마와 일본식 가마가 동시에 발굴되어 한말과 일본시대의 도자기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었다.
현재 완전하게 복원되어 훌륭한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1994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석굴 사원이 있는 미륵사지에서 동쪽 하늘재로 가는 초입에 미륵리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지방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3m의 크기이다.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탑신을 하고 있다.
현재 상층기단 면석과 3층 탑신 윗부분이 없어졌고, 노반석만 놓여 있으나, 탑신 각층의 비례가 신라식을 따른 단아한 석탑이다. 상층 기단석에는 두 우주와 중앙에 탱주 하나가 있으며, 초층 탑신에는 감실을 표현하고 있다.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이나 그 수법이 안정감을 주는 석탑인데, 기단 갑석의 부연이나 옥개석의 형태 등으로 보아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삼층석탑을 지나 조금만 더 언덕위를 오르면 선학원에서 한창 불사중인 미륵대원사가 있다. 여기서 월악산의 세 개 봉우리를 보면 마치 영봉은 누워있는 스님 모습, 2봉은 누워있는 여인네 모습, 그리고 삼봉은 기어오르는 거북모습을 하고 있다.
미륵대원지를 찾아가는 길은 충주에서 36번 도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국도를 따라 20㎞ 가량 가면 수안보온천이 나온다. 수안보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좁은 597번 지방도로를 지릅재를 넘어서면 송계계곡과 미륵대원지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미륵사지 주차장에서 상가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면 미륵대원지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