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3> - 충주시<1>

▲ 미륵리 삼층석탑 하늘재는 백두대간을 경계로 낙동강 유역의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하늘재(계립령)는 미륵대원지 혹은 이곳에 얽힌 여러 설화 등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고개이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금강산에 입산하기 위해 지나던 길이 계립령이며, 그 이전 고구려 온달 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진을 친 곳도 계립령이다. 그리고 충주 지방 교통의 요충지로 흔히 등장하는 곳도 조령과 더불어 바로 이 계립령인 것이다. 계립령에 대한 문헌 기록으로는 우선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3년(156)조에 있는 ‘사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 ’라는 부분을 들 수 있다. 이 대목은 우리 나라 역사상 국가가 나서서 길을 개척한 효시로 거론되기도 하는 부분인데, 동쪽 변두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신라가 계립령과 한강의 통로를 개척함으로써 삼국통일의 발판을 다진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계립령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계립령이 어느 고개인가는 그 동안 특히 향토사를 하는 이 지방 사람들의 큰 숙제였다. 왜냐하면 미륵리 서쪽 고개를 지릅재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표」에 보면 ‘쭕립현은 지금의 미륵대원 동령이 바로 그곳이다. ’라는 대목이 있어 하늘재가 곧 계립령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곧 ‘미륵대원’이라는 말은 1977년의 발굴 때 발견된 많은 문자 기와에서 그 절 이름이 밝혀졌고, 그 동쪽 고개는 하늘재로 부르는 곳인데 그곳이 바로 계립령(현)임을 『삼국유사』가 알려준 것이다. 그제서야 경주에서 하늘재를 넘어 송계 계곡을 지나 한강에 연결되는 길이 계립령임이 확인되었고, 계립령에서 조령(새재)으로 그리고 다시 이화령으로 변천된 영남 고갯길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인들이 계립령을 개척한 까닭은 한반도의 중앙에 있는 이 고개가 북으로 가는 길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립재가 지릅재로 된 것인데, 지릅재는 질러 가는 길(가까운 길)을 뜻하며 그것은 샛길과 어원을 같이 한다. 샛길은 ‘새’의 길인데, ‘새’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시하다 보니 조령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길목은 부산에서 의주까지 가는 곧은 길이고, 그리하여 그 길목에 예로부터 전통적인 오대 도시인 의주, 평양, 서울, 충주, 부산(동래)이 놓여 있었고, 이 길이 우리 역사상 문화 전파의 길과 침략 수단의 길이 되기도 했었다. 대륙의 문화가 일본까지 전파되는 길목이었고, 북쪽이 강할 때는 남진의 통로요, 남쪽이 강할 때는 북진의 경로였다. ▲ 하늘재를 알리는 표석. 오른쪽 길로 가면 한창불사 중인 미륵대원사가 나오고 왼편 길로 들면 하늘재에 닿는다.
계립령이라고 불렸던 하늘재는 신라가 백두대간을 넘는 길 중 최초로 개통한 오래된 옛길이다. 이런 유서 깊은 하늘재 밑에 미륵대원지라는 절터가 있다. 미륵은 인도 바라나국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보살이다.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현재는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교화하며 수행을 계속하고 있지만, 56억 7천만 년이 지나 사바세계에 내려와 화림원 용화수 아래서 성도 하여 3회의 설법으로 300억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설법을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이 때 미륵의 설법으로 생사의 번뇌에서 벗어나 극락세계로 가는 중생들은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 교화에서 빠진 중생들과, 그 이후에 사바에서 살다간 모든 중생들이다. 따라서 이 미륵보살을 보처미륵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성된 우리나라 미륵신앙은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 민중 속으로 뿌리를 깊게 내렸다. 미륵신앙이 민간신앙화 되면서 석불뿐만이 아니라 잘생긴 자연석이나 석주 등을 미륵님이라 부르고, 심지어는 장승조차도 미륵이라 부르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미륵은 중생들에게 미래불로서 희망을 주는 부처님이요, 현생의 고통에서 중생들을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주는 구제불이라는 점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미륵대원지는 충주 동남쪽 33㎞ 지점에 미륵리라는 마을에 있다. 미륵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마을 사람들이 ‘미륵댕이’라고 부르는 보물 제96호 미륵석불입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륵석불입상이 있는 절터는 ‘미륵사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대원지의 창건과 미륵석불입상의 영험함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아래와 같다. 신라 천년 사직이 고려에게 넘어가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 너머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마의태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쪽고개를 넘으면 절을 지을 만한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에 마애불을 조성하면, 억조창생에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꿈을 깬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상의하니 똑같은 꿈을 덕주공주도 꾸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매는 하늘재를 넘어서 마의태자는 미륵석불입상을, 덕주공주는 월악산 마애미륵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륵석불입상과 마애미륵불이 마주 보고 있는데, 국가에 큰 일이 일어나면 두 부처님 보옥에서 불빛이 비치며, 그 불빛이 어찌나 밝은지 밤중에도 땅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몽고가 침입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최근에는 한국전쟁 때도 그랬다고 하지만 미륵불의 영험함을 과장하려는 중생들의 욕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현재 이 절터에는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초기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는데, 그것으로 사찰의 창건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절터 위에 법등을 밝혔던 사찰의 구체적 연혁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발굴을 통해 발견한 명문와 중에 ‘미륵당’, ‘대원사’ 등의 글씨가 확인되어 그것으로 사찰 이름을 추정해 볼 수는 있으나, 다른 문헌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명문와 가운데는 고려 중기인 1192년(명종 22)에 해당되는 연호가 새겨진 것이 있어 그 무렵에 사찰이 중건 또는 중수된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다.

『고려사』에도 ‘충주 대원사’에 관한 기록이 있으므로 대원사는 당시 손꼽는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254년(고종 41) 몽고가 고려를 침입해 충주산성에 이어서 상주산성 등을 공격했었는데, 이 무렵에 절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충주에서 상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하늘재(계립령)를 넘어야만 했으므로 몽고군이 절을 지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발굴을 통해 고려 말 조선 초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나타나며, 조선시대 초에도 대규모 중수가 있었음을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절은 다시 소실된 듯하다.

그 뒤 18세기 무렵에 중수되었다고 전하지만 1936년의 홍수로 인해 금당터 동쪽에 산사태가 나서 매몰되면서 절은 폐허가 되었다. 현재 미륵사지는 사적 제31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긴 네모꼴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 14,000평 정도의 큰 절터로 1977년부터 청주대학교에서 1, 2, 4차,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3차 발굴작업을 하여 옛날 절터의 모습을 한 주춧돌 등의 배치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미륵대원지는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임이 드러났다. 곧 금당, 석등, 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방식인 것을 알 수 있다. 금당터는 남쪽 끝 3면에 석축을 한 자리인데, 그 중앙에 북쪽을 바라보고 위치한 미륵석불 입상과 그 앞 북쪽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석등, 오층석탑 등이 배치되어 있다.

석굴은 반만 석축을 하였으며, 그 이상은 목조로 지어 옥개부가 있었으며 석불입상 앞으로는 전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굴은 한국 석굴 사원의 계보를 찾고 연구함에 있어서 절대적인 유적으로, 창건연대 등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곳이다. 발굴 시에는 용두상, 사자상과 청동귀면상, 금동소탑 옥개석 및 각종 와당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군마가 그려진 기와, 호랑이가 노루를 쫓는 그림이 있는 인면와 등 독특한 것이 다수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기와 가운데는 또한 평와에 ‘미륵당초‘라고 새긴 명문와가 발견되어 이곳을 미륵사지로 추정하게 되었다.

금당은 불상이 있는 주실과 주실 앞에 있는 전실로 구분된다. 주실은 평면이 사각형으로 북쪽 방향을 제외한 3면을 돌로 높게 쌓아 올렸으며 그 벽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돌기둥과 돌기둥 사이에는 벽장과 같은 시설이 3개씩 있어 그 안에 앉아있는 나한상 등이 조각된 돌판 3매씩을 안치했다. 이 벽장 시설 위에 다시 돌을 쌓았고 동벽과 서벽에는 다시 6개씩의 벽장시설을 하여 앉아 있는 보살상을 1구씩 안치했다.

벽장 시설이 없는 남쪽 벽면에는 앉아 있는 부처와 보살상이 있다. 벽체의 윗면에는 안쪽에 주춧돌로 보이는 큰돌이 같은 규격으로 놓여 있어 지붕시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실에는 주춧돌이 사방에 놓여 있으며 그 중앙에 넙적한 판석을 깐 바닥에 놓인 대좌 위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 측면에서 근접하여 본 미륵불의 상호. 유독 얼굴에만 이끼가 끼지 않는다. 미륵리석불입상은 보물 제96호로 석굴 사원의 중심을 이루는 주존불이며, 높이 10.6m의 거대한 고려시대 초기의 미륵불이다. 불상은 절터 맨 안쪽에서 북쪽 송계계곡을 향하고 있다. 본래는 석굴법당 안에 세워졌으나 법당이 소실된 후 노천에 드러나게 되었다. 양식을 보면 보관까지 합하여 6개의 돌로 조각하여 세운 불상으로서 육계(肉琦)와 나발이 있고, 얼굴은 둥글다. 눈썹 역시 둥글어 직선적으로 감은 듯한 눈과 작은 입을 두텁게 표현하고 있다. 목은 굵고 3도를 약식으로 표현했으며, 어깨에서 발끝까지 같은 넓이로써 마치 판석을 이룬 듯 만들었다. 팔은 형체만 겨우 살렸으며 오른쪽은 가슴에서 펴고 있는 시무외인을 하고, 왼손은 연봉 혹은 약합인 듯한 것을 들고 있다. 판석으로 된 팔각형 갓을 쓰고 유난히 흰 얼굴이 돋보인다. 모서리 아랫면에 쇠고리와 걸쇠를 끼웠던 자국이 있으며 따로 만들어 붙인 백호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초기, 이 부근에서 다수 조성된 일련의 거불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인 점이 주목된다. 한편 석등과 석탑 사이에서 미륵불 존안을 바라보면 볼수록 화사하고 자비로움을 느끼는데, 그에 대한 이곳 스님의 설명은 이렇다. “이 부처님을 뵙고 그 얼굴이 화사하고 자비롭고 웃는 듯이 느껴지면 당신의 마음이 착한 증거요, 부처님의 존안이 밉고 화사하지 않게 보이면 당신의 마음이 사악하다는 증거입니다. ”전문학자들은 석불입상 뒤에 있는 석굴 석재는 퇴색되어 고태가 나는데 반해 이 석불입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화사한 데 대해, 석굴의 돌들이 다 튈 정도로 큰 화재가 났었다면 그 안의 불상도 지금처럼 생생하게 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석굴 윗부분이 건축물로 덮여 있었다면 불상에 갓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불에 그을린 얼굴 부분을 교체하고 갓을 씌우지 않았을까 한다. 곧 석불입상이 몸통과 얼굴 부분이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금당 바로 정면에는 지방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미륵리 석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2.3m이며,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 돌로 조성되었는데, 하대석에는 여덟 잎의 복련이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간주석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었다. 간주석 위 상대석에는 여덟 잎의 앙련이 새겨졌다. 팔각 화사석의 네 면에는 화창이 있다. 옥개석의 추녀선은 약간 반전하였으며, 꼭대기에 보주가 조각되었다. 그 옆으로는 논산의 관촉사 석등처럼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운 사각모양의 석등이 있다. 석등을 받치고 있는 기둥도 사각으로 만들었으며 각주(角柱)에는 연꽃문양이 시원스럽게 새겨져 있다. ▲ 마륵불은 멀리 월악산 자락의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고 있다.

금당 정면 중앙에 있는 미륵리 오층석탑은 보물 제95호로 높이 6m이며 이 석탑은 자연석을 다듬어 지대석과 기단부를 조성했으며, 기단부의 내부를 파내어 4면의 벽석을 만든 형태다. 기단의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지 않고, 갑석은 형식적 수법을 가미한 매우 좁은 두 장의 판석으로 덮여 있다. 탑신부는 초층 옥개석이 두 장일 뿐 다른 옥개석은 한 장씩으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석 역시 형식적으로 우주 모양을 모각하였을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노반은 지나치게 커서 탑신석으로 오해받기 쉬우며, 복발은 장식이 없는 반구형으로 꼭대기에는 철제 찰주만이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또 이 탑은 의상대사와 관련하여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철주가 피뢰침처럼 남아있는 오층석탑 상층부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대나무가 살아있단다. 이 대나무는 의상대사가 죽장을 탑 위에 꽂아놓고, “이 죽장이 살아있으면 나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고, 죽장의 대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은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살펴봐도 대나무 잎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자료 사진에서는 분명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의상대사의 죽장인지는 의심이 간다. 미륵리 오층석탑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시대의 고승이기 때문이다. 사원 경내의 오층석탑에서 북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 돌거북이 있다.

돌거북은 1977년 발굴 당시에 반만 드러났던 것이 출토된 것으로, 등에는 비석을 세울 수 있게 홈을 파 놓았으나 비신은 찾지를 못하고 있다. 정교한 맛은 없으나 규모가 매우 커서 길이 6.05m, 높이 1.8m, 너비 4m로 우리 나라 최대일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큰 거북이다. 이 비석만 발굴된다면 미륵사지의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층석탑 오른쪽 세계사가 있는 개울가에는 온달 장군이 힘자랑을 했다는 공깃돌 바위가 있다.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로 유명한 온달 장군은 고구려의 장수로서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고토를 회복하지 아니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신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전한 것으로 역사에 전해온다. 그런데 그 온달 장군이 단양군 영춘면 온달성에 산성을 쌓으니 바로 온달산성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이곳 미륵리(계립령)에도 온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온달장군은 신라가 개척한 계립령 밑에 군사를 주둔하여 성을 쌓고 군사를 교련했다. 그는 미륵당 내의 물을 마시고 힘이 세어졌는데, 바로 이곳에 있는 공깃돌을 갖고 힘자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공깃돌을 ‘온달장군 공깃돌’이라 부른다. 그 돌을 들어내면 하늘이 노하여 마른 하늘에 청천벽력이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 공깃돌 바위. 온달 장군이 힘자랑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또한 초등학교로 쓰던 학교 앞에는 말무덤이라는 큰 무덤이 있는데, 온달 장군의 애마 무덤이란 속설도 있다. 미륵리 사지 안에는 그 밖에 2개의 연화문을 조각한 당간지주가 쓰러진 상태로 누워 있으며, 불상 대좌로 보이는 연화문 받침돌이 있다. 전부 1977년의 발굴시 출토된 것이다. 미륵리에는 예전에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있다. 미륵리 와요지는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결과 17세기 이후 20세기 전반까지의 백자 가마와 일본식 가마가 동시에 발굴되어 한말과 일본시대의 도자기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었다.

현재 완전하게 복원되어 훌륭한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1994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석굴 사원이 있는 미륵사지에서 동쪽 하늘재로 가는 초입에 미륵리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지방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3m의 크기이다.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탑신을 하고 있다.

현재 상층기단 면석과 3층 탑신 윗부분이 없어졌고, 노반석만 놓여 있으나, 탑신 각층의 비례가 신라식을 따른 단아한 석탑이다. 상층 기단석에는 두 우주와 중앙에 탱주 하나가 있으며, 초층 탑신에는 감실을 표현하고 있다. 상륜부는 결실된 상태이나 그 수법이 안정감을 주는 석탑인데, 기단 갑석의 부연이나 옥개석의 형태 등으로 보아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삼층석탑을 지나 조금만 더 언덕위를 오르면 선학원에서 한창 불사중인 미륵대원사가 있다. 여기서 월악산의 세 개 봉우리를 보면 마치 영봉은 누워있는 스님 모습, 2봉은 누워있는 여인네 모습, 그리고 삼봉은 기어오르는 거북모습을 하고 있다.

미륵대원지를 찾아가는 길은 충주에서 36번 도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국도를 따라 20㎞ 가량 가면 수안보온천이 나온다. 수안보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좁은 597번 지방도로를 지릅재를 넘어서면 송계계곡과 미륵대원지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미륵사지 주차장에서 상가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면 미륵대원지가 나타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