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문 시인은 「바둑과 홍경레에서 보듯이 강한 반골정신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시를 쓰다 군사독재에 반대하여 1960년 절필을 선언하고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은둔하였다. 애곡리에서 그는 주민들과 어울려 농사를 지으며 침술을 배워 무료로 시술해 주민들로부터 신(辛)바이처라 불렸다.
시루섬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애곡리에 신동문 시인이 절필을 선언하고 내려와 살던 농장이 있다. 그의 시집에는 절필 전 1956년에 간행된 「풍선과 제3포복」이 있다. 신동문 시인이 살았던 애곡리는 사적 제398호로 지정된 수양개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수양개 선사유적전시관
애곡리 수양개의 강가 단구에 있는 이 유적지는 우리나라 구석기유적 조사 중 가장 넓게 발굴되어 3만여 점이나 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는 주먹도끼와 찍개를 비롯하여 좀돌 날몸돌과 슴베찌르개가 대량으로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50여 곳의 석기 제작소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밖에도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바램과 주술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젖소 정강이뼈에 새겨진 물고기 모양이 발견됐고, 씨앗, 숯, 꽃가루 등도 발견되어 당시의 생활과 자연환경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는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지이다. 출토된 유물은 현재 구단양에 있는 수양개 선사유적 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1. 수양개 유적 : 수양개유적은 1990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로 발굴된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시대의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현재 수양개 선사유적 전시관에 옮겨져 있는 출토유물들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