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에서 청주로 가는 옛 길은 여러 갈래다. 그 중 국도에 해당하던 길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新作路)로 변했다. 신작로란 새로 난 길이다. 옛 길을 확장하여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넓힌 것이다. 신작로는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식 조어(造語)다.

이미자의 노래 중 ‘그리움은 가슴마다’가 있는데 여기에 ‘바람 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하면서 신작로가 등장한다. 아스팔트가 생겨나기 이전, 보편적으로 쓰던 용어다. 일제의 신작로 개설은 표면적으로 한반도의 근대화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만주침략을 위한 물자수송의 간선이었다. 그래서 옛길은 점차 없어지고, 광복 후에도 그 현상은 계속되었다.

파발마가 달리고 등짐장수 봇짐장수가 가래 토시가 서도록 넘나들다 느닷없이 화적떼를 만나던 옛길, 암행어사가 출몰하여 탐관오리를 응징하던 옛길은 문명의 뒷전으로 사라져 이제는 그 자취를 볼 수 없게 됐다.

청주에는 현재 두 군데쯤 옛길이 남아 있다. 한 군데는 것대산에서 명암약수터에 이르는 길인데 도로가 뚫리면서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또 한군데는 송태호 팀장이 청주삼백리를 답사하며 요즘에 찾은 옛 길이다.

보은 회인에서 피반령을 넘어온 과객은 한계리 ‘한시울’을 지나 월오동 ‘하니말’로 길을 잡았다. 모자처럼 생긴 관봉(冠峰) 계곡에 납작 엎드린 ‘미티재’는 ‘한시울’과 ‘하니말’을 연결하는 옛 고개다. ‘미티재’ 또는 ‘미테재’라고 부르는 이 고개에는 남도 과객이나 장돌뱅이의 숱한 애환이 서려 있다.

알싸한 아카시아 향기는 꽃잎 따라 떠난 임의 발자취이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도록 풀잎을 묶어 결초(結草)하며 앙탈을 부리지만 어느새 관봉을 넘어온 마파람은 매듭을 풀어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월운천(月雲川) 들판으로 향한다.

‘미티재’를 넘어 ‘하니말’에서 한 숨을 돌리면 또 하나의 고개가 기다린다. 이름하여 ‘소미재’다. 아직도 이 길은 우마차가 다니던 흔적이 있고 현재에도 통행량이 많다. 동막골에서 나무를 해온 나무꾼들은 이 고개에서 지게를 받쳐놓고 한 참을 쉬었다.

동막골 나무꾼은 순박하여 나무 값이 헐하였다. 마른 삭정이나 장작 틈새로 ‘개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솔잎을 단으로 묶은 나무 짐을 속칭 ‘개비’라 하였다. 깍정이 나무꾼의 나무 짐은 속이 헐렁하여 실속이 없었는데 동막골 나무 짐은 속이 꽉 차고 값이 싸서 서문다리 제방에 있던 나무 전에서 금세 팔려 나갔다. ‘소미재’는 그 나무꾼들의 쉼터였다. 그곳에는 고단한 삶을 달래주던 주막도 있었다.

동막골 나무꾼들의 애환이 서린 ‘소미재’에는 빌라가 연이어 들어서고 있다. 나무꾼의 사연은 빌라 주택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소미재’와 ‘미티재’에도 포장도로가 들어선다는 얘기가 나돈다. 그렇게되면 보은~청주를 잇는 청주의 마지막 옛길도 없어지게 된다.‘소미재’를 넘으면 월오동~운동동을 적시는 월오천이 흐른다.

월오천은 무심천으로 흘러드는데 무심천의 지류 중 가장 깨끗하다. 아직도 피라미, 새뱅이가 서식한다. 월오동 길가에는 양수척(楊水尺) 효자비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성종 때의 효자 양수척을 기린 효자비인데 드물게 천민의 효자비라는 점이 시선을 끈다.  이곳을 ‘비선 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양수척 효자비에서 유래한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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