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에 청주동물원에 들린 적이 있다. 동물원은 이제 초창기와는 달리 산만하지 않고 이런 저런 볼 것을 많이 갖췄다.
가파른 지형이 관람객들에게 다소 부담이 되지만, 면적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다.
호랑이도 있고, 원숭이도 있고, 뱀도 있으니 재미난 굵직한 동물들은 모아놓은 셈이다. 입장료도 싸다. 자동 매표기가 자주 멈춰있어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탈이지만.
그 때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물범과 캐나다기러기였다. 동물원 입구에는 바로 물범이 있어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다. 엄마물범과 아기물범이 같이 놀고 있었다.
태어난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큼직한 아가가 엄마 옆에서 수영을 배우고 있었다. 색깔이 엷고 몸을 옮기는 것이 어정쩡해 귀엽기 짝이 없었다. 금줄도 매달아놓아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한 가득한 눈망울을 지닌 아기물범에 큼직한 검은 눈동자를 떼지 않는 어미의 자태는 감동적이었다.
캐나다기러기는 오리처럼 생겼다. 오리보다 좀 크고 목이 긴 꼴이다.
그런데 개방형 새장에 있는 이놈의 기러기가 인도에 버티고 서서 오고가는 사람에게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살펴보았더니, 글쎄, 가로등 바로 아래에서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을 피해서 알을 낳지 하필 이런 곳에서 그랬나 싶을 정도로 통행로 바로 옆에서 어부인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기러기는 비장한 태도로 전혀 걸음을 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목을 치켜세우면서 가까이 오는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멋모르는 아이가 덤벼들었다가는 다칠 지경이었다.
사람이 조금 비켜가게끔 경계선이라도 쳐두던지 할 것이지, 사내라는 게 뭔지, 얼마나 맘 고생할까 싶었다.
저 번 주에 또다시 동물원에 찾아갔다. 물범이 얼마나 컸을까도 궁금하고, 기러기에게 줄이라도 쳐주었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물범은 혼자였다. 아기 물범이 덩치가 너무 커지긴 했지만 색깔로 보아서 아기였고,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매점의 아줌마는 관람객이 던진 비닐을 먹어 죽었다고도 하고, 수위아저씨는 새끼가 죽었다고도 하고,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알아보니, 엄마가 죽은 것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우리 아기 물범은 혼자서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캐나다기러기는 가로등 옆에 둥지만을 남겨놓은 채로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니 우측 동산에 목을 길게 뺀 부부가 보였고, 그보다 작기는 하지만 비슷한 덩치의 새끼 두 마리가 붙어 다니고 있었다. 새끼는 아직 털이 잿빛으로 고동색을 띄고 있지 못했다. 부부의 노력으로 결국 두 마리의 자식을 얻은 것이었다. 짙은 두 머리 사이의 옅은 두 머리를 쳐다보기 위해서 우리는 한 달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나는 동물원에서 생각했다. 우리 동물원에는 왜 이런 ‘이야기’가 없는지. 동물의 세계란 사람의 세계와도 같아서 이런 세월을 담고 있는 것인데, 그들의 가족관계가 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일까. 이를테면 원숭이 우리 안의 치정관계와 권력투쟁은 꽤나 재미있는 것 아닐까.
나는 우리 청주동물원이 이런 이야기를 담아내서 관람객들의 관심과 애정을 좀 더 끌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청주동물원이 ‘이야기하는 동물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물개가 비닐을 먹고 죽었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무지를 반성해야 할 터이고, 가로등 밑의 둥지는 치우지 않아야 그냥 새가 아니라 ‘캐나다기러기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기억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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